‘이층의 악당’으로 돌아온 한석규, “이젠 내가 뭘 잘할 수 있는 지 알아”
입력 2010-11-19 17:40
“분명히 슬럼프는 또 올 거예요. 평생 오겠지요. 하지만 한 번 겪어보고 나니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렸을 때가 가장 두려운 순간이지요.”
한때는 ‘흥행보증수표’라고 불렸던 그 이름과 도회적인 이미지가 어떤 선입견을 제공하고 있었을까. 1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석규(46)는 의외로 소탈해보였다. 점퍼에 모자를 눌러쓴 채 “다른 옷을 안 갖고 와서요”라고 말했다.
영화 속 ‘창인’이 큰 소리로 외치는 주민등록번호가 마치 그 자신의 것인 듯 “어느새 한석규가 저 나이를 먹었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성공과 실패를 굽이돌아 다시 스크린 속에 선 그의 연기는 무척 천연덕스러웠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다 잘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젠 제가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도시인이에요. 제가 종암동에서 나고 자란 서울토박이인데, 연기를 위해서 아무리 지방 사투리를 연습해본들 진짜 시골 사람들처럼 할 수 있을까요? 영화가 잘 될 때도 있었고 안 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제가 무엇에 어울리는지 알 것 같네요.”
손재곤 감독의 새 영화 ‘이층의 악당’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문화재 장물아비 ‘강창인’이다. 시가 20억원짜리 고려 찻잔을 훔치기 위해 창인은 소설가를 가장, 연주(김혜수)의 집 2층에 세 든다. 모녀가 집을 비우는 낮이면 1층으로 몰래 내려와 집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다가 인기척을 듣고는 지하실에 숨기도 한다. 능청스러운 얼굴로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골프를 좋아한다는 그는 “이번 영화는 적어도 파 정도는 할 것 같다”고 했다.
“코믹하고 밝은 이야기인데 거기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이 하나씩 어두운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이야기 이면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할까요. 유일하게 창인만큼은 그런 어둠이 없는 사람인데 다른 인물들에게 조금씩 전염돼 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로 하여금 이 영화를 택하도록 만든 것은 상대역 김혜수였다고. 심은하·전도연·고소영·최진실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과 공연한 바 있는 한석규지만 김혜수에 대한 애정은 유별났다. 스스로 ‘팬’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1995년 처음 함께 찍은 영화 ‘닥터 봉’ 이후 15년 만의 재회이기도 하다. 그는 “15년 전 주연으로 만난 사람들이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주연으로 다시 만난다는 것은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드문 일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김혜수씨가 활동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왔고 5∼6년 전부터는 팬이 됐어요. 출연 제의가 왔을 때 상대역이 김혜수라는 말을 듣고는 ‘어, 이것 봐라’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번이 18번째 영화라 골프로 치면 한 라운드를 마무리한 셈인데 첫 영화와 18번째 영화를 김혜수씨와 함께 한 것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스스로 ‘한 라운드를 마무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자부심이 그에겐 있었다. 거듭되던 찬사나 충격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온 배우의 역량 비슷한 것이. “안 될 때는 정말 모든 것이 다 안 됐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막막하기만 하고…. 그래도 계속 해야지 어떻게 손을 놓겠어요. 슬럼프가 한 번만 오진 않겠지만 그땐 또 극복하고 조절해야겠지요.”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