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편 18色’ 인간·세월에 대한 무한 상상력… 박민규 두 번째 소설집 ‘더블’

입력 2010-11-19 17:38


우리 시대의 문제 작가로 박민규(42)를 꼽는 이유는 한국문단에 던지는 그의 강력하고 차별적인 상상력에 있다. 행갈이와 여백 등의 시각적인 장치를 능란하게 활용해 정서적인 효과를 배가시키거나,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비유들로 독자의 상상력을 추동하는 그의 문장은 박민규표 소설을 담보한다.

그가 5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더블’(전2권·창비)을 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작가가 직접 마스크를 쓰고 촬영한 각권의 표지 사진이다. 멕시코의 전설적인 레슬러 ‘블루 데몬’과 ‘엘 산토’를 모티프로 삼은 것이다. 지난해 그가 한 문학상 시상식에서 쓰고 나타나 화제가 되었던 블루 데몬 마스크이다.

그동안 쓴 24편의 단편 가운데 추린 18편을 두 권으로 나눠 묶은 이유에 대해 그는 “LP 시절의 ‘더블 앨범’에 대한 로망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더블’은 상·하권이 아니라 side A, side B로 나뉜 음반과 같은 느낌을 준다. 작가 스스로 “지난 시절 나를 이끌어준 모든 ‘더블 앨범’에 대한 헌정이자 크고 묵직한, 그리고 근사했던 LP 시절의 정서에 대한 작은 예찬”이라 밝힐 정도로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이번 소설집이다. 그만큼 ‘더블’은 박민규의 문학적 매력이 집대성된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중키의 나무들이야 일후(日後)에 심은 것들이고, 지금 눈앞의 버드나무가 그때는 유일했었다. 그래 이 나무다. 아마도, 라는 기분이 들 만큼 키가 낮아진 느낌이지만 또 그것은 열두 살 소년의 아련한 기억일 테지, 우거진 녹음 속에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습필(濕筆)인 양, 늘어진 두엇 가지들이 뚝뚝 젖은 그늘을 땅 위에 떨궈낸다. 번진다, 번진다//번짐이 멈춰선//저 근처다”(‘근처’-1권 11쪽)

소설집 첫머리에 실린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근처’의 도입부지만, 그의 문장이 이처럼 행갈이를 전제로 하는 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을 통해 화자의 정서를 최대한 배려하기 위함이다. 그의 변칙적이고 기발한 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근처’가 얼마나 정통 소설작법을 따라 써졌는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박민규가 소설의 기본기에 충실한 작품 또한 얼마나 잘 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뿐 아니다.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노인의 시선으로 삶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 ‘누런 강 배 한 척’(이효석문학상 수상작)과 요양원을 배경으로 노년의 사랑과 회한을 섬세하게 묘사한 ‘낮잠’ 역시 인생과 세월에 대한 깊은 심도를 보여준다.

“출근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불과 십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달아난 저녁잠처럼 세월도 그렇게 지나간다. 이제 어떤 버스도 오지 않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영원한 퇴근이다.”(‘낮잠’-2권 9쪽)

그런가 하면 먼 미래를 배경으로 심해 탐사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은 곳을 탐구하는 ‘깊’과 시공을 알 수 없는 다른 우주들의 이야기를 그린 ‘크로만, 운’ 등은 그 자체로 빼어난 SF소설에 값하고 있다. 또 ‘양을 만든 그분께서 당신을 만드셨을까?’ ‘루디’ ‘끝까지 이럴래?’ 같은 작품은 반묵시록적인 세계관과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이 빛을 발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나, 지구의 울음소릴 듣고 싶었어. 이어지는 고요 속에서 샘케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꼭 한번은 말이야. 하지만 실은 인간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드미트리가 속삭였다. 룸도 인체의 확장일 뿐이야, 조금 전의 소리도 그 인체가 낸 울음이고, 룸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깊’-1권 135쪽)

이렇듯 ‘더블’에 실린 단편들은 그 소재와 성격, 분위기가 무척이나 다채로워 과연 이 작품들이 모두 한 작가가 써낸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때로는 이종 격투기 선수처럼 때로는 프로 레슬러처럼 상상과 현실, 변칙과 정통을 모두 포괄하며 그것들을 적재적소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가가 박민규인 것이다.

그는 소설집 앞머리에서 “나는 흡수한다/분열하고 번식한다/그리고 언젠가//하나의 채널이 될 것이다”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있다. 자가발전과 변종을 거듭하면서 예측할 수 없이 뻗어나가는 그의 상상력 앞에서 우리는 모두 문학적 무국적자가 되고 만다. 그게 박민규 소설의 매력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