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순만] 왕실문화재
입력 2010-11-18 17:48
국내로 반환될 일본 궁내청(宮內廳) 소장 한국도서와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외규장각 도서의 목록과 내용이 알려지면서 찬탄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왕실행사를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긴 의궤는 언론에 소개된 일부만 보더라도 세밀한 그림, 선명한 글씨, 미려한 종이의 질과 꼼꼼한 장정 등 조선 서책문화의 품격에 찬사가 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1993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반환을 약속한 직후 여성 사서들이 돌려주기 아깝다고 울고불고 하는 통에 반환이 어려워졌다는 말이 아주 낭설은 아닌 듯하다.
왕실 문화재는 각 왕조 절정의 문화적 성취를 담은 걸작이 대부분이다. 고대의 정복자들은 문화를 빼앗지 못하면 나라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도서관들이 오래된 정복 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멸실됐다. 성경에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켰을 당시 약탈해간 품목이 기록돼 있다. 특히 예레미야 52장에는 약탈해간 성전의 기둥이 소상하게 그려져 있는데, 손가락 네개 두께의 기둥 표면에 석류 96개를 새겨 넣은 솔로몬 왕조의 찬란한 건축문화가 선연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한 터키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는 불타는 왕실의 서책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가 나온다. 왕조의 서책을 완성하기 위해 밤새도록 촛불 밑에서 글을 쓴 필경사가 새벽 첨탑에 올라가 눈을 쉬는 동안 정복자들이 입성해 칼리프를 처형한다.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고 수만권의 책은 티그리스 강으로 던져진다. 이윽고 강은 책에서 번져나온 잉크 때문에 붉게 물든다. 책의 불멸을 믿었던 당대 최고의 필경사 이븐 샤키르는 그 후 영원히 글을 쓰지 않았다 한다.
2000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꼽혔다. 세계 최고 문화의 힘을 과시한 것도 엘리자베스조(朝)라는 평가다. 지난 5월 고급 필기구 브랜드 몽블랑이 역사적인 예술후원자를 기리는 ‘리미티드 에디션 펜’(한정본 만년필)으로 ‘엘리자베스 1세’를 선보였다. 펜 뚜껑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좌우명인 ‘진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Video et Taceo)’라는 글귀를 새겼다. 봤더라도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것은 고급 문화의 규범. 프랑스와 일본은 우리 왕실문화재를 약탈해 갔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화재의 가치를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머지 문화재도 있던 곳에 되돌려줘야 한다.
임순만 수석논설위원 s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