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지식인 깨달음의 순간들… ‘진실에 눈을 뜨다’

입력 2010-11-18 17:26


진실에 눈을 뜨다/해리 크라이슬러/이마고

1963년 스물여덟 살 청년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문단에 꽤 이름을 알린 작가였다. 자신만만하던 그는 첫째 아들이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태어나자 위안을 받겠다며 자신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그는 그러나 자신의 책으로는 저자인 자신조차 위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이후 현실에서 도피해 관념적 태도로 일관하던 그는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를 위한 병원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시게토 후미오라는 의사가 던진 한마디가 그를 뒤흔들었다.

“우리는 생존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병의 특성조차 알지 못합니다. 매일 1000명씩 죽지만, 저는 시체들 가운데서도 계속 무언가를 할 겁니다. 겐자부로씨,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한데 제가 그들을 돕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행성에 당신 아들 말고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아야만 합니다.”(289∼290쪽)

직후 아내와 아들이 있는 도쿄로 돌아온 그는 소통과 치유의 문학으로 나아가는 휴머니스트로 거듭났고 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은 어떻게 인생을 바꾸는 계기를 맞게 됐을까? 현실에 냉소적이면서도 순응하고 마는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지식인들은 현실의 아픔을 예술적 저항의식으로 승화시키거나 불의를 목격하면 거대 정치권력에 가려진 진실이 무엇인지 간파하는 통찰력을 발휘했다. 이런 ‘예술적·정치적 각성’은 우연히 얻어지지 않았다. 이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하게 보게 해주는 지난한 삶의 끝에서 비로소 나온 것이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의 국제관계연구소 상임이사인 해리 크라이슬러가 세계를 바꾼 우리 시대 리더와 사상가들이 경험한 깨달음의 순간을 책으로 엮었다. 유명 인사들과의 대담을 비디오로 녹화해 대중에게 보여주는 ‘역사와의 대화’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저자는 1982년부터 2009년까지 475회 이상 치러진 대담 중 20편을 엄선했다.

20인은 노암 촘스키 같은 진보적 사상가들부터 ‘국방부 문서’를 폭로하며 베트남전 반전운동을 이끈 평화운동가 대니얼 엘스버그, 나이지리아의 선구적인 인권변호사 오론토 더글러스, 이슬람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란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 ‘뉴요커’의 여류 기자로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에 숨은 이면을 폭로한 제인 메이어,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 ‘욕망하는 식물’의 저자이자 음식운동가인 마이클 폴란, 여성학의 관점에서 이제까지의 역사를 비판한 사학자 조앤 월락 스콧 등 각 분야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다. 각성의 순간을 경험한 이들의 개인사는 개인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베트남 전쟁에서부터 이란혁명과 아파르트헤이트,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굵직한 현대사의 숨 가쁜 현장을 넘나들며 변혁을 이끌어냈다.

찰머스 존슨(79) 일본정책연구소장의 이야기는 ‘제국을 위한 기수’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참여적 지식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베트남전 당시 CIA 국가평가청 자문역을 맡았던 찰머스 존슨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아시아와 중남미에서 냉전체제를 지속시키려는 미국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또 95년 일본 오키나와 미군 성폭행 사건을 조사하다 ‘비극적이지만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린 미국 정부에 실망하고 노선을 변경한다. 찰머스 존슨은 미국 정부가 신보수주의 정치인과 군산복합체와의 ‘음험한’ 카르텔을 깨지 않는다면 과거 로마제국처럼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9·11사건이 있은 지 이틀 뒤 대통령이 의회 연설 중 ‘왜 그들은 우리는 증오할까요?’라고 질문하더군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당신 측근들이 그 이유를 잘 알겁니다.’”(221쪽)

‘행동하는 역사학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1922∼2010)의 각성의 순간은 더욱 극적이다.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 조선소에 취업한 그는 아무리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며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에 맞아 쓰러진다. 그는 순간 경찰도 정부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이제 급진주의자”라고 선언한다. 이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 폭격수로 참전해 프랑스의 무고한 마을에 네이팜탄을 떨어뜨린 뒤 ‘좋은 전쟁이란 없다’고 확신하는 반전주의자가 된다.

흑인 정치인 론 덜럼스(75)가 젊은이들에게 남긴 조언은 다른 여러 지성들의 충고를 압축한다.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고, 정치인들은 부패했고, 인류는 절망적이라는 냉소주의에 빠져선 안됩니다.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만이 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뒷짐 진 구경꾼이 될 것인지, 주변 환경을 바꿀지 결정하십시오. 이를 해내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84∼85쪽)

책은 이처럼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만나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됐는지 보여준다. 현실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정치적 허무주의와 무관심에 빠진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는 진지하고 묵직한 자기 성찰을 독려하는 자극제가 될만하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