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이디’의 힘 NLD 비밀아지트를 가다… 이영미 기자, 미얀마 지하 당원들과의 5일
입력 2010-11-18 21:37
아래위로 내 옷차림을 훑어보는 나잉(가명)의 얼굴이 난감하다. 옆에 선 윈(가명)에게 걱정스러운 눈짓을 한다. “어쩌지?” 하고 묻는 것 같다. 이번에는 윈이 나를 살핀다. 그의 표정은 읽기가 어렵다. 둘이 빠르게 무슨 말인가 주고받는데 버마어여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낯선 방문객의 복장불량 얘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쩐지 잔뜩 주눅이 든다.
지난 13일 오전 나는 미얀마의 옛 수도이자 최대 도시 양곤 다운타운의 한 아파트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지하당원의 비밀 아지트였다. 20여 평 크기에 가구는 소파와 간이책상이 전부. 곰팡이 핀 그릇 몇 개가 개수대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최소 한 달은 묵은 듯했다. 베란다 창살에는 바지 세 벌이 걸려 있다. 그 너머, 숯 검댕을 바른 듯 시커먼 양곤 시내 건물들이 내려다 보였다.
변장이 필요했다
NLD 지하당원 나잉과 윈은 한국에서 온 여기자 한 명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초록색 7부 바지에 하이웨스트 티셔츠와 샌들운동화, 크로스 백. 관광지가 아닌 도심 뒷골목을 걷기에 차림새가 너무 튀었다. 미얀마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전통치마 롱지를 입는다. 총선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수치 여사 석방까지 앞둔 민감한 시기였다. 사복경찰과 정보원은 곳곳에서 외신기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변장’이 필요했다.
나잉의 지시에 따라 바지 위에 남색 주름치마를 덧입고, 검은 색 플립플랍(납작한 샌들의 일종)을 신었다. 가방은 바꿔들기로 했다. 나잉이 크로스 백을, 내가 나잉의 검은 숄더백을 들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중국계 버마인이 많아서 중국인으로 보이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당신은 절반 중국인, 절반 한국인으로 보여요. 할 수 없네요. 피부색이 다르니.” 나잉이 체념한 듯 말했다.
아파트 문을 나서기 전 주의사항을 들었다. 거리에서는 절대 영어로 말하지 말 것, 두리번거리지 말 것.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윈이 나를 향해 버마어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너머로 건물 관리인과 좌판대 아주머니가 보였다. 나중에 윈이 설명했다. “입주자에 관해서는 뭐든지 알고 싶어 하고, 또 뭐든 알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항상 조심해야 해요.”
윈의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양곤 시내 곳곳에 포진한 조직원의 전화였다. 그는 정보 허브였다. 이쪽 보고를 저쪽에, 저쪽 정보를 반대쪽에 전했고, NLD 중앙의 지시를 비밀당원들에게 퍼뜨렸다. 군중이 모인 곳에는 가지 않았다. 지지자나 당원이 있는 곳도 피했다. 대신 멀찍이 떨어진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며 어슬렁댔다. 윈도 원래는 공개된 NLD 당원이었다. 2007년 승려의 샤프론 혁명이 유혈 진압된 뒤 탈당을 결심했다.
“그때 당의 상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엉망인지 절실하게 깨닫게 됐어요. 당 조직은 감시가 심해서 아무 일도 못해요. 내가 ‘공식 청년조직과 별개로 비밀 네트워크를 만들자’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게 지금 내가 일하는 조직이에요. 우리는 더 이상 2007년처럼 무기력하지 않아요.”(윈)
아침에 만난 NLD 법률자문 우 아웅 테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며칠 전에도 사복경찰에게 하루 종일 미행당했다. 가족도 감시받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아예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비밀 활동가인 윈에게는 일정한 거처가 없다. 다운타운 아파트가 아지트이긴 하지만 타인 명의여서 밤에는 비워야 했다. 매일 밤 24시간 찻집이나 PC방을 전전하다가 아침 일찍 아지트로 돌아와 잠을 잤다. ‘손님 명단 보고’ 때문이다.
미얀마에서는 등록 거주지 외의 장소에서 숙박하려면 동사무소에 신고해야 한다. 경찰은 한밤에 기습해 자고 있는 가족의 머릿수를 셌다. 신고 없이 외박을 하다 걸리면 최소 벌금, 운이 나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검문은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았다. 12일 만난 양곤의 한국 교민은 “자고 있는데 경찰 10여명이 찾아와 여권 등 서류를 다 뒤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정보는 뿌리부터 통제했다. 컴퓨터와 복사기, USB 등 각종 기기 구입은 허가제였다. 면허 없이 USB를 소지했다가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이도 있었다. 윈의 비밀 네트워크는 최근 A4 용지 크기의 선전용 전단 20만장을 전국에 뿌렸다. 제작은 첩보작전처럼 이뤄졌다. 신원을 빌려 복사기를 구입한 뒤 ‘안가(安家)’에 모셔놓고 밤에 몰래 찾아가 작업했다.
‘미얀마의 386’을 만나다
16일 NLD 당사에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들이 하루 종일 들락거렸다. 지팡이 짚은 이는 흔했고,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는 고령도 있었다. 당사를 오가는 이들의 3분의 2는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NLD가 노인이 돼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통제와 가난은 이들을 첨단기술에 무지한 구시대 인물로 만들었다. 니안 윈 대변인은 “이메일을 쓸 줄 모른다”고 했고, 수치 여사는 지지자들의 손에서 번쩍이는 카메라폰에 놀랐다. 하지만 NLD의 미래는 이들이 아니었다.
최근 미얀마 청년 민주화 운동가들은 K(가칭)라는 이름으로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윈이 속한 비밀 네트워크 등 7개 조직이 K 산하에 있다. 연합체는 점조직으로 운영된다. K 중앙은 산하 조직 우두머리에게만 연락한다. 그래서 K 대표를 맡고 있는 틴(가명)조차 산하 조직 멤버수와 인적사항은 모른다고 했다. K 주축은 20∼30대 젊은이, 규모는 수천 명이라고 했다.
틴은 33세인데 아직도 대학생이다. “졸업할 시간이 없었다”며 웃는 그가 수업 대신 무엇에 바빴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NLD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를 묻자 틴은 지식인의 책임을 거론했다. “사람들은 불평만 하지요. 나는 교육받은 사람입니다. 나라를 바꿀 책임이 있습니다.”
20대 후반의 윈은 학생도, 직장인도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시위를 조직했다가 적발됐다. 학교가 강요한 시위 불참 서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그는 그대로 학교를 떠났다. 그 후 10여년 윈은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2007년 이후에는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왜 위험을 무릎 쓴 채 NLD를 위해 일하는가? 윈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탄 쉐 장군의) 군부독재 기간 중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농담이 있다. 미얀마에서 음식 걱정 안 하고 살 방법은 딱 세 가지가 있다. 정부 관계자의 친인척이 되거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외국에 나가 노동자로 일하거나, 아니면 감옥에 가거나.” 감옥에서는 어차피 음식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 포기할 거란 얘기였다.
20대 중반 여성 조직원 나잉은 자신을 ‘모태 운동가’라고 소개했다. “부모님이 모두 NLD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정치는 생활의 일부였어요. 활동가가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어요. 지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거죠. 제가 비밀 조직원으로 일한다는 건 부모님도 알고 있어요. 물론 적극적으로 지지하시지요.”
가족의 심정적 후원에 관해서라면 비밀 아지트에서 만난 법대 3학년생 나이 나이(가명)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수치 여사를 좋아하고 지지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에 무조건 찬성이에요.” 다른 듯 비슷한 사연. 격렬한 학생운동기를 겪은 한국인에게 낯익은 이야기였다.
‘해골 택시’와 람보르기니
미얀마인의 고난이 군부의 정치 탄압 때문만은 아니다. 부패와 가난은 더 큰 짐이었다. 미얀마에는 권력자 비리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지난해 양곤 시내에는 근사한 커피숍 하나가 생겼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고 권력자의 친인척 한 명이 커피숍을 탐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포크레인으로 건물을 밀어버렸다고 했다. 시내 고급 호텔과 은행, 항공사, 목재회사 등을 소유한 미얀마의 세 번째 부자도 최고 권력자와 가까웠다. 권력자 친인척의 앞마당에 색깔별로 서 있는 고가 스포츠카 람보르기니를 봤다는 이도 있었다.
람보르기니의 반대편에는 ‘해골 택시’라고 불리는 낡은 택시들이 있다. 차체와 좌석, 핸들, 기어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이런 별명이 붙었다. 대부분 연식이 20년 이상 된 일제 차량이다. 해골 택시가 내뿜는 매연은 상상을 초월한다. 양곤 시내 건물이 까만 이유다.
해골 택시를 양산한 건 정부 정책이다. 미얀마에서는 중고차 수입만 허용된다. 국산차는 거의 생산되지 않는다. 노후차가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에어컨이 나오는 차량은 상급으로 분류돼 가격이 3000만원을 넘는다. 20년 이상 된 해골 택시도 대당 2000만원을 웃돈다. 1000만원이 넘는 번호판 구입비 때문이다.
그나마 양곤 시내는 부유한 편이다. 양곤강 너머는 또 다른 세계였다. 딱 10분 페리를 타고 다운타운 남쪽 양곤강을 건너면 농촌 마을 ‘들라’가 나온다. 15일 오후 들라 중앙로는 택시와 자전거 릭쇼, 사람, 소가 한데 뒤엉켜 흘렀다. 중앙로 오른편 샛강 변에는 난민촌으로도 열악해 보이는 판잣집이 즐비했다. 동네 아이들은 소똥과 염소똥이 짓이겨진 흙바닥에서 맨발로 뛰어놀았다. 사정은 그나마 고아원이 나아 보였다. 들라의 파라미고아원에는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 당시 부모를 잃은 5∼17세 어린이와 청소년 25명이 살고 있었다. 원생들은 동네 아이들보다는 밝고 깨끗했다.
우 윈 마웅 파라미고아원 교장은 “이 동네 아이들 대부분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부모가 양곤에 일하러 간 사이 밥도 굶는다. 어렵긴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 읽기 쓰기는 물론이고 영어도 배운다”고 말했다. 후원금 덕이었다.
미얀마인에게 아웅산 수치란
태국 일간지 방콕포스트는 16일 “수치 여사의 석방은 군부정권이 그녀를 더 이상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이런 목소리는 드물지 않았다.
수치 여사가 고국 미얀마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다. 1960년 15세의 나이에 인도 델리로 떠난 그녀는 43세가 되던 88년까지 영국과 미국, 부탄, 일본 등지를 돌아다녔다. 소녀가 두 아이 엄마로 성장하기까지 28년간 미얀마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88년 중풍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국에 돌아온 수치 여사는 그 후 22년간 미얀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 22년 중 15년은 가택연금 상태였다. 수치 여사가 만든 NLD가 82%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90년 총선도 벌써 20년 전이다. 그녀의 파워가 예전 같지 않을 거란 짐작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수치 여사의 정치적 폭발력은 여전히 굉장해 보였다. 모이고 환호하고 박수치게 하는 힘. 군부가 두려워하는 게 그것이라면, 그녀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석방 다음 날인 14일 그녀는 하루 종일 군중을 몰고 다녔다. 낮 12시 그녀의 첫 대중연설이 예정된 NLD 당사 앞에는 1만여 명의 인파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같은 날 오후 양곤 외곽 노스 오카라파 마을에서 열린 NLD 당원 가족의 장례식장에서도 동일한 장면이 연출됐다. 수치 여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고함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녀 주위에 당원들이 몸으로 만든 공간은 밀려드는 인파에 점점 좁혀지더니 수치 여사는 결국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모인 이들은 대여섯 살 동네 꼬마부터, 갓난아기를 안고 온 주부, 60∼70대 노인까지 다양했다. 3대가 함께 온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수치 여사를 “마(버마어로 어머니)”라고 불렀다. 외국인에게 말할 때는 “더 레이디(The Lady)”라는 영어를 썼다. 그녀는 버마 독립의 1등 공신이자 국부(國父)로 불리는 아웅산 장군의 딸이다. 국모(國母)라는 얘기다. 여기에 62년 이래 50년 군부독재의 상처가 더해졌다.
수치 여사에게 업적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잊고 있는 게 있는 듯했다. 미얀마인들은 그녀가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에 열광했다. 도덕성과 비폭력. 수치 여사가 그 두 가지를 잃지 않는 한 그녀는 여전히 위협이었다.
1987년 6월 10일과 1988년 8월 8일
미얀마 역사는 한국과 닮은꼴이다. 미얀마는 1886년부터 60여년간 영국 일본에 번갈아 지배를 받다 1948년 독립했다. 자유는 짧았다. 62년 쿠데타로 군부독재에 들어간다. 35년 일제 지배 후 45년 독립한 한국에서 군사독재가 시작된 것도 엇비슷하게 61년이다.
민중항쟁 역시 비슷한 시기 벌어진다. 1987년 6월 10일 한국의 6·10민주항쟁과 1988년 8월 8일 미얀마의 ‘8888 민주항쟁’이다. 두 나라의 행로가 갈라지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이다. 6·10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서울의 봄’을 낳았다. ‘8888 민주항쟁’이 남긴 건 무자비한 유혈진압과 수천 명의 사망자였다.
그 후 20여년이 흘렀다. 시간은 두 나라를 전혀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 2010년 11월 12일, 한국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로 들썩일 때 미얀마 국민들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석방 문제로 마음을 졸였다. 미얀마의 역사는 어디서 어긋난 것일까. 우리가 겪은 게 기적인지, 그들이 반복하는 게 비극인지 알 수 없었다.
양곤=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