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중고품과 골동품
입력 2010-11-18 17:59
16세기 초반,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이끈 스페인 원정대는 각각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왕국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들은 두 문명 세계가 만들어낸 찬란한 황금 문화재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해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스페인 왕국은 이 보물들을 녹여서 금화로 만들었다. 그 탓에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은 이제껏 미지의 문명인 채로 남게 됐지만, 그 덕에 스페인은 이후 100년 넘게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됐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떠나면서 175명의 학자들을 데려갔다. 그들도 이집트의 고대 유물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지만, 이번에는 금이나 은이 아니라 돌멩이들을 가져갔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 로제타스톤도 나폴레옹 원정대의 약탈품 중 하나다(이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로제타스톤을 영국에 빼앗겼다.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있다).
스페인 사람들이 반문화적이었거나 프랑스 사람들이 훨씬 학구적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영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1759년이고, 루브르박물관은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3년에 개관했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의 시민 계급은 국내의 승리에 도취돼 있었을 뿐더러, 자기 민족의 영광스러운 자취를 지구 전역에 새기려는 욕망에도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값나가는 재물보다 자기들에게 정복당한 땅과 문명에 대한 기억을 담은 기념물들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도의 거대한 박물관에 정복지의 문화재들을 긁어모아 두고서는 자국 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제국의 영광’을 과시했다. 뒤늦게 제국주의적 팽창에 뛰어든 다른 나라들도 이를 모방했다.
국가와 군대가 다른 나라의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리는 동안, 개인들 사이에도 수집 취미가 불붙기 시작했다. 19세기가 되면, 낯설고 신기한 것은 ‘다른 세계에서 온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산업혁명은 모든 것을 아주 빠르게 바꿔 놓았다. 수천, 수백 년 동안 너무 익숙했던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낯선 것으로 바뀌는 경험은 모두에게 일상적이었다. 모든 물건이 ‘언젠간 사라질 것’으로 인식됐고,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옛날 물건들은 ‘이국적인 것’과 같은 지위를 얻었다. 어떤 사건과 시점에 특별한 표시를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할 근거가 사라져 자신의 정체성마저 위태로워질지 모른다는 조급함도 사람들의 의식 한편에 자리 잡았다. 오래된 물건들이 ‘낡은’ 물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기억의 고리’로 소중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사회의 변화 속도에 비례한다. 정체된 사회에서는 옛 물건이나 지금 물건이 별로 다르지 않다. 아직도 대량 생산되고 널리 사용되는 물건이라면 새것을 두고 헌것을 고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어떤 물건의 생산과 사용이 중단되는 순간, 그 물건의 지위는 ‘중고품’에서 ‘골동품’으로 수직 상승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싹 튼 것은 일본인들이 이미 수많은 문화재를 가져간 20세기 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싹인 채로였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보통 사람들은 ‘외국인의 눈’으로만 자기 문화재를 평가했다. 변화가 일상이 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 희소해진 1970년대 이후에야 자기 문화재를 ‘역사 기억의 저장고’로 이해하는 태도가 확산됐다. 그래도 ‘최근까지 써 오던 것’들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 ‘근대 유물’들의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 특히 경술국치 10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 겹친 올해를 앞두고 관련 유물들의 호가는 2∼3년 사이에 10배 이상 뛰어올랐다. 근대 유물이라고 해봐야 별 것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의 삐라 조각, 1950∼60년대의 교과서와 방학숙제 책, 교실 구석에 붙어 있던 반공 표어나 포스터, 버스 토큰과 회수권, 학생증이나 공무원증, 양은 도시락 통, 연탄집게나 석유곤로, 엿목판과 엿장수 가위, 도장 새기는 기구나 구두 수선 도구 따위로, 몇 해 전만 해도 고물상조차 가져가지 않던 것들인데 어느새 ‘유물’이 되어 박물관들의 수집 대상 목록에 올라 있다.
근대 유물 투기나 부추기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회사나 학교나 교회에서, 사원과 학생과 교우 가정의 기억이 담긴 근대 유물들을 모아 스토리가 있는 작은 박물관들을 하나씩 만들어 보면 어떨까. 유물이 남아돌거나 유지가 어려워지면 그때 가서 국공립 박물관에 기증해도 좋다. 국립민속박물관, 각 지자체의 역사박물관, 새로 문을 열 대한민국역사박물관까지 그런 유물들을 기다리는 곳은 많다.
전우용<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