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속 우리말, 뿌리는 일본말?… ‘사쿠라 훈민정음’

입력 2010-11-18 17:22


사쿠라 훈민정음/이윤옥/인물과사상사

말의 배경을 알고 쓸 때와 모르고 쓸 때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 시절 성적 평가의 척도였던 ‘수우미양가’. 이 등급이 일본 전국시대 때 자신이 베어온 적의 머릿수를 세는 단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수우미양가’ 제도를 입에 올리기가 불편해진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거나 보챌 때 쓰는 ‘땡깡’이라는 단어는 일본말로 간질을 뜻한다. 이를 알고 어찌 일상에서 ‘땡깡부린다’는 표현을 버젓이 쓸 수 있을까.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이 우리말 속에 숨어 있는 일본말의 찌꺼기를 찾아내고, 그것이 우리말로 침투한 배경을 추적했다. 일어 표현이 우리말에 정착한 배경과 본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또한 우리말 지키기에 무관심한 정책 당국을 향한 저자의 따끔한 지적은 후련하게 들린다.

책이 주목하는 단어는 ‘땡땡이’ ‘야매’ ‘노가다’와 같이 일본어인줄 알고 뻔히 짐작하면서 쓰이는 말보다, 일본에서 유래한 줄 모르고 써온 일본 한자어들이다. ‘방명록’ ‘신토불이’ ‘애매모호’가 그러하다.

우리말 중에 어차피 70%가 한자말인데, 일본에서 쓰인 한자든 원래 쓰던 한자든 무슨 차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김씨라도 호적을 뒤져보면 본이 다르고 파가 다르듯이, 원래 우리가 쓰던 한자말과 일제 식민지 시대에 침투된 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신토불이’는 1989년 농협중앙회가 대대적으로 벌인 ‘우리 농산물 애용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표현으로 자리잡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 말은 1907년 일본 육군 식양회가 먼저 사용했다. 식사를 통해 건강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만든 이 단체는 자기 고장의 식품을 먹으면 몸에 좋고 남의 고장 것은 나쁘다는 것을 말할 때 ‘신토불이’를 썼다고 한다.

국어사전에서 뜻풀이를 할 때 일본어 표시가 안 돼 있는 경우가 많아, 우리말에서 일본어 찌꺼기를 걸러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한 ‘달인’은 일본식 표현이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달인을 대체할 토종 표현은 고사하고 일본에서 온 말이라는 표식도 없다.

언어학자들이 우리말 속의 ‘일본말’에 대한 경각심이 없는 것도 큰 문제다. 방아찧기를 뜻하는 도정은 일본식 표현인데도 국내 논문과 번역서에서 버젓이 쓰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방아찧기를 ‘용정작미’라고 하는데 학자들이 이를 도정이라고 풀이하는 것에 저자는 참담한 심정을 토로한다.

소리는 분명 일본말인데 일본어의 원뜻과 한국에서 쓰이는 뜻이 달라 언어의 형성 과정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객원연구원,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를 역임한 저자는 일본어 전문가다운 해석을 내놓는데, 매우 그럴듯하다.

일본말로는 마음이 개운한 모양을 뜻하는 ‘사바사바’가 어떻게 한국에서는 뒷거래를 통해 떳떳하지 못하게 은밀히 조작하는 짓을 의미하게 됐을까. 현재까지는 속세를 뜻하는 불교 용어 ‘사바’에서 유래했다는 추측과, 자신의 밥을 덜어서 새에게 주는 일어 ‘산바’에서 유래한다는 해석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저자는 일어로 고등어를 뜻하는 ‘사바’라는 단어에서 실마리를 얻는다. 일본에서는 얕은 속임수를 쓸 때 ‘고등어 수를 센다’고 표현하는데 거기서 ‘사바사바’가 오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사바사바’를 ‘숙덕공론’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숙덕공론’으로 ‘사바사바’의 느낌을 다 전달할 있을까. 언어의 발음에서 오는 느낌, 그간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면서 굳어진 인식 등 그 단어 특유의 분위기를 순우리말이나 우리의 한자어로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 ‘나와바리’는 독무대, 무대, 텃세로 바꿔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왠지 ‘나와바리’를 구역으로 해석하면 어째 밍밍한 느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어 ‘바지(Barge)’와 배를 뜻하는 선(船)이 합쳐진 바지선도 마찬가지다. 거룻배라는 표현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대체할 우리말이 없는 경우엔 일본어의 잔재를 우리말로 순화하려는 고민에 뾰족한 답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이 시작된 것만으로도 저자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토박이말이 사라지고 있고, 국어순화운동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우리말을 찾으려는 의식 자체가 귀중하기 때문이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