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노석철] 검찰의 재수사 악몽
입력 2010-11-17 17:57
검찰 조직에서 ‘재수사’는 부끄러운 단어다. 외과 의사가 엉뚱한 곳을 도려내거나, 환부를 절개한 뒤 아무것도 없다고 덮었다가 재수술을 해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스스로 치명적인 실수를 만천하에 인정해야 하니 자존심에도 적잖은 상처를 받게 되는 일이다. 재수사는 통상 두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다. 자기 식구가 비리에 연루된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살아있는 권력에 민감한 부분을 어물쩍 넘어가려던 경우다. 거악과 맞서 싸우는 것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검찰에게 재수사는 너무 큰 상처다. 사회의 곪고 썩은 환부를 도려내야 하는 검찰의 위상에도 흠집이 불가피하다.
검찰이 ‘그랜저 검사’ 의혹을 다시 수사하겠다고 나섰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고통스런 결단은 환영할 일이다. 의혹의 내용은 정모 전 부장검사가 후배 검사에게 “지인인 김모씨가 아파트 사업권을 둘러싸고 투자자 등 4명을 고소했으니 사건을 잘 봐 달라”는 취지의 청탁을 해주는 대가로 그랜저 승용차 대금을 대납받았다는 것이다. 정씨는 이런 혐의로 고소를 당했으나 검찰은 지난 7월 무혐의 처분을 했다.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정씨와 정씨를 무혐의 처분한 검사는 최소한 정도를 벗어난 셈이다. 검사들 사이에서 건설업자는 경계 대상 1호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늘 민원이 발생하고, 투자자들 사이에선 고소·고발이 난무한다는 것을 웬만한 검사들은 안다. 그래서 검사가 건설업자와 친하다는 것을 떠들고 다니거나, 그 사람들 민원에 개입했다가는 반드시 뒤탈이 난다는 것은 법조계의 상식이다.
그래서 건설업자에게 그랜저를 받은 검사나 그를 무혐의 처분한 검사도 이해하기 힘들다. 뇌물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이 가장 즐겨 쓰는 말은 “대가성 없는 돈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업자’가 공직자나 ‘갑’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은 그 사람과 단순히 친분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도움을 받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돈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을 가려줘야 하는 검사라면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 용돈을 받았더라도 그건 포괄적인 대가가 있다고 스스로 느껴야 된다. “대가성 없는 돈은 없다”고 말하는 검찰이 제 식구에게는 “대가성 없는 돈도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을 국민들이 이해 못하는 이유다.
한 가지 더 이해 안 되는 것은 검찰의 결재라인과 감찰시스템이다. 검사의 비위는 통상 중요사항으로 검찰총장까지 보고된다. 게다가 “사건 관계인에게 그랜저를 받았다”는 것은 흘려듣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이런 사건을 무혐의 처분하는 데 결재라인이 모두 사인을 하고, 검사 옷을 벗기는 수준에서 끝내려 했다면 제대로 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검찰이 재수사를 되풀이하고 불신을 자초하는 것은 늘 타이밍 때문이다. 제 식구나 권력에 대해 검찰권을 엄정하게 행사해야 하는 시점에 좌고우면하다 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검찰은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 비리 혐의에 대해 느긋해하다 여론에 등 떠밀려 ‘늑장수사’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앞서 김대중 정부 때는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최규선 게이트 등 잇따라 터진 권력형 비리에서도 타이밍을 놓쳐 권력에 약한 검찰이란 소리를 들었다.
현 정부 들어서도 유독 수사속도가 느리거나 수사결과가 성에 차지 않는 건 권력과 관계된 사건들이다. 이른바 민간인 사찰 의혹에서 갈라져 나온 ‘대포폰’ 의혹과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의 비리의혹 수사가 마음에 걸린다. 물론 검찰이 일부러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사건을 축소 수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검찰이 재수사를 한 사건 가운데는 수사가 핵심까지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의혹이 불거지고, 여론에 밀려 수사를 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여론은 검찰의 그런 속사정을 배려하지 않는다. 검찰이 권력이나 제 식구에 관련된 사건은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더 엄정한 잣대를 적용해 주기를 국민들은 원한다.
노석철 사회부 차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