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광화문 유감

입력 2010-11-17 17:57

고종실록 2년(1865) 9월 17일조에 ‘영건도감(營建都監)에서 서사관(書寫官) 명단을 적어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건될 경복궁 전(殿) 당(堂) 문(門)의 현판을 쓸 사람들이다. 광화문 훈련대장 임태영, 건춘문 금위대장 이경하, 영추문 어영대장 허계, 신무문 총융사 이현직. 모두 무관이다. 반면 궁 안 전과 당의 서사관은 모두 문관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중건은 이씨 왕가의 숙원이었다. 세도정치를 물리치고 왕권을 회복하려 한 대원군은 서사관으로 명필이 아니라 최고위 무관들을 택했다. 무인의 거센 필세(筆勢)로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임태영이 영건도감 제조로서 경복궁 중건 책임자이므로 광화문 현판을 썼다는 말은 잘못됐다. 4대문 서사관이 모두 영건도감 제조를 겸직했으며 군 지휘관으로서 공사 질서를 감독하라는 뜻이다. 영건도감 총책임자는 도제조(都提調)로 영의정 조두순과 좌의정 김병학이었다.

어린 고종 대신 수렴청정을 한 조 대비가 특별히 챙긴 쓴 곳은 왕비 침전인 교태전이었다. 여기에 당대 명필 조석원을 배치했다. 정조 때 명필 조윤형의 손자로 당시 이조참의였다. 정조 때부터 후사(後嗣) 문제로 골치를 썩인 만큼 왕비 침전에 각별한 신경을 쓰지 않았는가 싶다. 교태전은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나온 말로 천지의 좋은 기운을 받아 만물이 융통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공 들인 경복궁은 이어(移御) 8년 만인 고종 13년(1876) 대화재로 전각 830여간이 잿더미가 됐다. 광화문 복원 석 달 만에 갈라진 현판과 논란을 보면서 경복궁 수난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광화문 현판은 목재 갈라진 것만 따질 일이 아니다. 광화문은 복원이지만 현판은 불완전한 복제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복원해야 할 원(元)이 온전하지 않다. 유리원판 사진에서 디지털 기술로 살려낸 것은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다. 광화문광장에서 아무리 오래 현판을 바라봐도 광훈(光?을 느낄 수 없는 까닭이다.

발터 벤야민은 복제기술에 의한 생산물에는 아우라(Aura)가 없다고 했다. 예술가가 신이나 자연을 최초로 모방했을 때만 아우라가 깃든다는 것이다. 추사(秋史)가 절필(絶筆)인 봉은사 판전(板殿)을 쓸 때 나이 70세. 임태영이 서사관으로 명 받았을 때는 74세. 나무 갈라진 것보다 노장(老將)의 아우라가 사라진 광화문 현판을 보는 게 더 우울하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