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강원 삼척시 근덕면 홍옥녀 할머니

입력 2010-11-17 17:43


“보릿고개 시절 가난한 이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많이 했드래요”

홍옥녀(72) 할머니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의 ‘살아있는’ 지역교회사다. 할머니의 남편 오일묵 장로(2004년 작고)가 지역 최초의 교회 동막교회를 개척한 주인공. 홍 할머니는 ‘목사 아닌 목사’ 남편과 함께 사는 동안 ‘사모 아닌 사모’로 살아야 했다며 웃었다. 할머니는 남편이 목회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생계를 책임지는 한편 사모로서 가난 구제에도 앞장섰다. 보릿고개 시절 가난한 자들의 쉼터였다는 할머니의 집엔 지금껏 대문이 없다.

동막교회 개척한 남편

테레비 보면 어떤 데는 사남매 낳았다 오남매 낳았다. “아이고 팔 남매 낳은 사람도 있는데.” 우리 앉아 웃느라고 그래요. 우리가 칠십 둘이니까. 그때 동네동네 다니면서 산아제한이라는 게 있었어요. 우리는 믿는 집안이라 영감이가 (산아제한을) 못 하게 하고. (남편이) 태초에 아주 자기가 믿음 생활 할 때 서울 가 신학교 댕겼어요. 신학교 들가 가지고 공부하다가 육이오 사변이 나가 내려왔어요. 다시 졸업 못했어요. 목사는 못되고 여기 내려와서 교회<동막교회>를 개척해가지고, 우리 여 사랑방부터 개척해가지고 시작했어요. 여 사랑방에 사람이 차니까 여 앞에 교회 선 그 자리가(에) 배급소 사무실이 있었어요. 그 사무실을 우리가 사 가지고 그래 교회를 그때 개척했어요. 그 다가<거기에> 손수 인제 종 떼 달고. 옛날에는 이래 방맹이가<방망이>로 때리는 종 그걸 달아가지고.

야소교 집안에 시집

내가 시집 온 지가 하마 54년째래요. 내 고향은 용하용화요. 개차워요<가까워요>. 우리 아버지가 교회란 말 안하고 야수교<야소교·개신교>라 하더라고. 옛날에 중신이 다 들가잖아요. 근덕에 야수교 다니는 사람 집이가 불른다고<부른다고>. “아버지 야수교가 뭐래요?” 교회 댕기는 집이라 하더라고요. 나는 욕심에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까. 그때만 해도 국민학교 배운 것만도 억지로 배웠거든요. 교회 가면 공부를 한다 하더라고. 그걸 생각하고 시집을 왔지. 저가 그러니께네 아야 2남5녀 중에 맏이.

신앙은 없었어요. 무교 집안인데 우리 아버지는 야수교를 좋아하더라고요. 옛날부터 그래 좋아하면서는 야수교 믿는 집안이기 때문에 나를 시집보낸다 그러더라고요. 우리 할머니가 전에 절을 대녔다고 하더라고요.

스무살에 장로님(남편)은 그때 스물 여섯 노총각이었데요. 목회하니라고 늦었대요.

기독교대한감리교회죠. 신학교를 감신 학교를 나왔더랬어요. 아펜실러<아펜젤러>가 세운 학교요.

그때 여<여기> 미국서 나온 목사님. 거푸게(정확한 이름을 기억 못했다) 목사님. 그 목사님이가(한테) 참 사랑 많이 받았어요. 우리 영감을 대문짝만하게 (사진)찍어가 줬어요. “이거 가지고 있다가 남북 통일되면 경계선에 삼팔선에다가 사진을 붙여다가<붙여다오>” 이랬대요. 미국서 편지를 왔더라고요. 아이고 니가 결혼했나. 아이고 세 식구 오라고 오라고. 한국말 잘했어요. 내가 그때 보낸 거를 여태 안 없애고 갖고 있어요. 우리 영감을 그렇게 귀여워했대요. 이 손수건이 이기가 하마 53년째예요. 이 수건이가 하얘는데. 자수가 참 고바요<고와요>. 거푸게 목사님 그 목사님은 처녀로 돌아가셨어. 처녀로 가서 목회를 하시다가 제단에서 돌아가셨더래요. 설교하시다가. 동생분도 그렇게 갔대요. 제단에서 나도 우리 언니처럼 그렇게 기도하고 설교하고 죽게 해달라고. 거기서 연락이 왔는데 그랬대요.

혹독한 시집살이

육이오 지낸 제가 그러니께네 6년 지났을 때지요. 하구 대게 가난했지요. 농사 안 지으면 살 수가 없지요. 초기에 저 고생 많이 했으요. 여 와 가지고 주로 농사일만 했지요. 저 일 많이 했습니다. 장로님은 안 해봐서 못하고. 내가 시어머니 시할머니하고 주로 농새<농사>로. 그땐 땅 안 파면 못 먹고 살아요. 주로 땅 파갔고 먹고 살고.

팔남매 났잖아요. 옛날에는 애기들 지금처럼 안 키웠어요. 맥여만 놓으면 방안에 놔두면 그래가 키웠어요. 방안에서 컸지요. 지가 걸어댕기면 이런 데 댕기고. 아주 옛날에는 기저구도 없었어요. 아무 천이고 이키 대면 되고. 그래도 애들 때문에 고생하거나 하지도 않고 팔남매를 낳아도 병원이라곤 모르고 살았어요. 스물한 살에 낳기 시작해서 마흔 둘에 막내 낳았네요.

오늘이라도 모 심구다가<심다가> 저녁에 와 낳고 이랬어요. 산파 없었어요. 나 혼자 나요. 사람들도 못 보게 해요. 첫 아이고 뭐고 여덟이 다.

시집살이 마이 했어요. 이 지역 치고도 그만치 한 사람 없을 거래요. 여자래도 이 지게를 짊어지고 일 많이 했어요. 그런 거 봐선 내가 건강한 편이래. 그리고 옛날에는 저 분전<분뇨>을 퍼내고 다 지게 짊어지고 밭으로 보내잖아요. 비료가 없기 때문에 밭에다 퍼내요. 내가 다 했어요. 시어머니 내가 시집 올 때 마흔 여섯인데 여든 둘에 돌아가셨어요. 계속 같이 살고 3년 동안 또 치매 앓느라고 3년은 또 제가 계속 병 수발하고.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여자는 시집 가가지고 귀먹어 삼년, 말 못해 삼년, 눈 멀어 삼년 합이 9년을 살아야 된다 하더라고요. 9년이 아니라 20년을 살아도 안 되더라고요(웃음).

믿음으로 견딘 세월

저는 인제 믿는 가정에 와서 믿으면 확실히 믿어야 한다. 우리 아버지가 참 헛된 말 안하시거든요. 확실하게 믿어라 그러기 때문에. 진짜 믿음으로 안 크면 살 수가 없지요. 믿음으로 살았지 지금까지도.

힘들 때 교회 가서 기도하고 이 앞에 교회 있을 때 밤중에도 영감 나가자면 나가고. 영감 하자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신앙생활 했어요. 우리 영감하곤 싫은 소리 안 해 봤어요. 시할머니, 시어머니, 영감, 우리 애들. 4대째 믿는 거지요.

내가 (농사일을) 육십까지 했으요. 아들이가 엄마 인제는 농사 실컷 지었으니까 하시지 말라고. 육십까지 했는데 그때 또 병들어가지고 몸이 아파가지고 병원에 원주병원에 가서 두어 달 있느니라고 그래가 못했어요. 마이 아팠으요. 삼척병원에 있다가 못 고친대고 해가지고 글루 안 갔으면 죽었어요.

군인들도 그런 병이 다 걸린다 하더라고. 무슨 그 쥐오줌 냄새 맡으면 죽는다는 그 병에 걸렸어요. 그 병에 걸렸다 살았다고 하니까 진짜 기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기가 혈을 따라서 그래기 때문에 아프는 지도 모르고 첨에는 감기 몸살 같은데 정신을 잃어뻐려요. 큰딸 아이가 서울서 간호사로 있었거든요. 그아가 엄마 이래 놔두면 못 살겠다고, 병원에서는 안 내놀라고 하는데 가가 막 그래가지고 원주로 갔어요. 가니까 장사 준비하라데요. 장사 준비하라는 거를 우리 아들이 다 신앙이 좋거든요. 우리 엄마는 절대 안 죽는다고. 삼일 만에 살아났어요.

내 살아온 거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나는 고생 안 했다고 그래요. 다 하나님 덕이지요.

우리 영감은 평생 무료 봉사

우리 영감님 장로님으로 있었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목사 아닌 목사를 했다고. 여태까지 무료 봉사하면서.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옛날에 시골 교회 나가는 거 뭐라 했어요. 때려주면서 못 가라<가지 마라> 그랬어요. 힘들었지요.

그 전에는 주로 우리가 요 집에서 가게를 봤습니다. 우리 영감이가 노동을 못하니까 가게를 봐가지고 교회 헌금이라도 허고, 내가 생활해야 한다고. 할매니하고 어머이하고는 농사 짓고 우리 영감은 가게를 봐가지고 수업<수입> 나는 건 교회다 다. 과자 팔고 뭐 이렇게 잡화, 학용품 팔아가지고 수입이 나는 거를 교회 다 봉사하고 했지요.

우리 영감은 돌아가실 때까지 교회 일만 하셨어요. 저는 사모 아닌 사모를 하느라고 애를 먹었어요. 영감 받들어가지고 일 할라내. 또 시골엔 얼마나 욕이 많아요. 막 교회 댕기는 사람 어떻다는 둥 욕을 마이 했어요. 육이오 사변 나고 우리 영감은 또 붙잡혀 가고 경찰서 가서 자고도 오고 그랬어요. 그 전에 교회 다니는 사람 핍박 많았어요. 진짜 목숨 바치고.

아 그렇게 해야 돼요. 믿을라면 아주 확실히 믿어야 돼요. 뜨뜻미지근하게 믿을라면 아예 믿지 말고. 하나님 말씀도 그렇잖아요. 뜨겁던지 차갑던지 너는 한 가지를 하라 그랬는데.

여가 동해 삼척지방이거든요. 우리 영감 모르는 사람 없어요. 오일묵 장로님. 교회서는 오 장로님하면 모르는 사람 없어요.

교회에만 열정적으로 했어요. 새벽예배는 한 번도 안 빠지고 아파가 드러누워 있어도 엎고라도 가야 해요. 자상하지만 한 마디씩 해도 겁을 내지요. 항상 시시때때로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애들 클 때는 아침마다 예배를 드려요. 밥 먹을 때 우리 아들은 아직도 그 찬양하잖아요. 아버진 계속 이 찬양했다고.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아침마다 돌아가며 손뼉 치매 앉아가지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밥 먹지요.

교회 그 전에는 뭐 전부 다 애들이고, 우리 집에 어른들하고 한 많애야 다섯 여섯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내가 시집오고서는 어른들이 조금 되고. 진짜진짜 힘들었어요. 헌금도 거의 없어요.

겨울에 클스마스<크리스마스> 그때 행사해도요, 다 우리 장로님이가 준비를 다하고 그랬지요. 지금은 청년들이 있고 하지만 옛날에는 청년들도 없었어요. 먹는 것도 우리 집에서 다 하고. 국수를 하던가 뭘 허던가 마이 해야 해요.

또 옛날에는 질<길> 가는 사람들 마이 자고들 갔어요. 어떤 덴 자고 가고도 행편 없이 뭘 가져가기도 하고 그래도 재워 보냈어요. 내 이부자리 해가 재워 보내고 이래도. 질 가는 사람들 배고프다 하는데 그냥 보낼 수 없지. 마이 했어요.

우리 영감 오고 마을 복음화 마이 됐지요. 밤중에 한 시가 되고 두 시가 된다 해도 우리 장로님이 가신다 하면 그 사람을 믿는다고 하고 다들 나갔어요. 사람 믿게끔 살아야 해요.

근데 자식을 키우는데 부모들 하는 거 보고 뒤 꼭지 따라들 가는 거 같아요. 우리 인제 아들이 하마 둘이가 목회잡니다. 대학 다 보냈어요. 공부 잘하고 착해요 진짜. 또 사위 하나가 목회해요.

예수사랑 있어야 행복

세상 사람들 돈 많고 이러면 잘 살아 놓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아닌 거 같아. 나는 생각이 지금이고 그 전에고 생각이가 돈 많아가 잘 산다는 건 다 거짓부렁 같아요. 돈 아무리 많애도 자살하는 사람 얼마나 많아요. 그거는 예수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없는 거 같아.

서로가 가족이라는 건 사랑을 주고받고, 사람을 사람답게 생각을 하는 게 그게 잘 사는 거지. 돈 재워놓고 사는 거는 잘 사는 거 아닌 거 같아요. 없어도 그냥 기쁘게 기쁘게 사는 게 그게 잘 산다고 나는 그렇게 보는데. 그래도 나 이래 걸어온 길을 보면은 고생시럽다 해도 그때가 좋은 것 같애. 고생해도 기뻤다.

연보

1938년 강원도 삼척 용화마을에서 2남5녀 중 장녀로 태어남

1958년 강원도 삼척 동막리 오일묵씨(당시 26세)와 혼인

1959년 장남 세영 출생

1962년 장녀 미숙 출생

1964년 차녀 미선 출생(남편이 영광감리교회 지희수 목사)

1967년 3녀 복금 출생

1970년 차남 세봉 출생

1972년 3남 세훈 출생(현 충북 단양 노동감리교회 담임목사)

1977년 4남 세창 출생

1980년 5남 세문 출생(현 김포 고촌감리교회 전도사)

동막교회는

1955년 4월 강원도 삼척 근덕면 동막리에 설립됐다. 홍옥녀 할머니의 남편 오일묵 장로가 서울에서 내려와 개척했다. 처음엔 사랑채에서 가정 예배로 시작했다. 그 시절만 해도 마을에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식 교회 건물이 지어진 해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교회가 한창 부흥했을 때는 성도 수가 200여명에 이르렀다. 현재는 35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70대 이상 노년층이다. 1989년 리모델링됐다. 이학신(39) 목사가 7대 담임목사(2002년∼현재)다.

삼척=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김태형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