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도 반한 내연산 절경, 연작 ‘내연삼용추’ 그리다… 진경산수화의 고향 ‘포항 청하’

입력 2010-11-17 17:38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불리는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은 노구를 이끌고 ‘경북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포항 내연산을 올랐다. 청하현감으로 부임한 지 한 해가 지난 1734년 가을 무렵이었다. 환갑을 앞둔 나이였으나 청하골의 절경에 발걸음조차 가벼웠다. 겸재는 이날 둘러본 내연산의 절경을 ‘내연삼용추(內延三龍湫)’라는 연작 작품으로 그렸다. 진경산수화의 완성을 만천하에 고하는 순간이었다.

포항 청하는 노거수(老巨樹)의 고장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7번국도 주변은 수령 수백 년이 넘은 회화나무를 비롯해 팽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 노거수들이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청하면과 이웃 송라면에 회화나무가 많은 까닭은 뭘까? 포항시 문화관광해설사 배수연씨는 습기로 인한 바닷가의 풍토병을 예방하기 위해 선조들이 수분 흡수력이 다른 나무에 비해 3배나 월등한 회화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기 때문이란다. 겸재의 ‘청하성읍도’에 등장하는 회화나무는 청하현청이 있던 청하면사무소 앞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부임 첫해에 그린 ‘청하성읍도’는 마치 헬기를 타고 그린 듯 부감법을 최대한 살린 작품. 당시의 현청과 성곽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500년생 회화나무 한 그루는 살아남아 자신을 그림으로 남긴 겸재를 기억하고 있다.

경북팔경 중의 하나인 내연산은 낙동정맥이 울진 통고산, 청송 주왕산, 영덕 백암산을 거쳐 남하하다 동쪽으로 가지를 뻗은 명산으로 곳곳에 비하대 등 암벽이 솟아있다. 특히 내연산과 천령산 사이의 협곡을 흐르는 12㎞ 길이의 청하골에는 12개의 폭포가 저마다의 멋을 자랑한다.

겸재가 내연산을 찾은 때는 가을 중에서도 만추 무렵으로 추측된다. 암벽과 폭포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골산을 화폭에 담으려면 단풍잎이 어느 정도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보경사에서 ‘내연삼용추’의 무대인 연산폭포까지는 2.7㎞. 발끝에서 바스락대는 낙엽들의 밀어와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만산홍엽과 일진광풍에 흩날리는 낙엽이 눈과 귀를 멀게 한다. 상생(쌍생)폭포, 보현폭포, 삼보폭포를 지나 연산폭포로 가는 구름다리 아래에 서면 겸재의 ‘내연삼용추’를 빼닮은 절경이 나온다. 낙엽과 함께 흘러내리는 관음폭포의 하얀 폭포수는 너무 깊어 검은 색을 띠는 소로 쏟아진다. 폭포 옆으로는 동굴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관음폭포는 ‘내연삼용추’ 그림처럼 두 줄기로 쏟아지는 쌍폭포이지만 가을 가뭄 탓에 동굴 입구의 폭포는 어린아이 오줌줄기처럼 가늘다.

구름다리 뒤의 암벽은 학이 깃든다는 학소대. 겸재의 그림에 사다리가 설치된 곳으로 구름다리를 건너면 학소대와 비하대 사이로 연산폭포가 절경을 자랑한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여느 폭포와 달리 연산폭포는 바위를 타고 흐르는 와폭. 푸른 이끼와 낙엽을 배경으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은실처럼 황홀하다.

겸재는 연산폭포 옆 암벽에 갑인년(1734) 가을에 정선이 다녀갔다는 뜻으로 ‘甲寅秋 鄭敾(갑인추 정선)’을 새겨 놓았다. 하지만 탐승각자(探勝刻字·명승지 바위에 새긴 이름)는 쉽게 찾을 수 없다. 글자를 새긴 암벽 앞에 물웅덩이가 있어 접근이 어려운데다 각자의 크기가 작고 깊게 새기지 않아 오랜 세월 풍화로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관음폭포와 연산폭포 주변의 암벽과 바위에는 모두 300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많은 각자 중 경상도 관찰사 이광정의 이름 옆에는 경상도의 관기 달섬이라는 뜻의 ‘慶妓達蟾(경기달섬)’이 새겨져있다. 하물며 기생조차 이름을 선명하게 남기는데 청하현감인 겸재는 왜 각자를 작고 희미하게 새겼을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국을 유람했던 겸재에게 당대의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행위가 죄스러웠던 때문은 아닐까?

겸재의 ‘내연산폭포도’와 부채그림인 ‘고사의송관란도’에는 잘생긴 낙락장송 한 그루가 등장한다. 관음폭포 옆의 깎아지른 절벽인 비하대에 뿌리를 내린 노송이 겸재의 작품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청하 기청산식물원의 이삼우 원장(70). 전국노거수협회 회장인 이 원장은 10여년 전 ‘갑인추 정선’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답사한 끝에 작품 속의 낙락장송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를 발견했다.

40m 높이의 비하대로 올라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관음폭포 앞에서 다리를 건너 밧줄이 설치된 등산로를 올라 비하대에 서면 발 아래로 관음폭포와 청하골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이 원장에 의해 겸재송과 정선송으로 명명된 노송은 휘어진 모양새가 부채그림의 노송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겸재가 두 그루의 소나무에서 장점을 취해 ‘고사의송관란도’를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겸재의 ‘내연삼용추’에 나오는 연산폭포 관음폭포 잠룡폭포는 헬기를 타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라시대의 와편이 나뒹구는 선일대에 오르면 관음폭포와 잠룡폭포가 보이지만 비하대와 학소대에 둘러싸인 연산폭포는 보이지 않을뿐더러 길도 없다.

그렇다면 겸재는 한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 개의 폭포를 왜 한 장의 그림에 그렸을까. 실경을 그대로 묘사하는 중국풍의 사생화에 염증을 느낀 겸재는 실경에 내면을 담아 재해석하는 진경산수화를 창시했다. 그리고 내연산에서 영감을 얻어 진경산수화를 완성했다.

금강산을 다녀온 지 20여년 만에 그린 겸재 생애 최고의 역작인 ‘금강전도’도 사실은 청하현감 시절에 완성했다. 우리 고유의 그림양식이 완성된 진경산수화의 고향인 청하는 전국의 수많은 절경을 유람한 겸재의 눈에도 매우 특별한 곳이었나 보다.

포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