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여사가 등장한 순간 TV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입력 2010-11-16 09:57

미얀마인들은 생각보다 솔직했다. 미얀마는 위험하지도 않았다. 며칠째 양곤 시내의 컴컴한 뒷골목을 혼자 헤매고 다녔지만 대도시 다운타운에서 들 법한 경계심은 생기지 않았다. 가방 지퍼가 열려 있으면 행인들은 굳이 불러 세워 알려줬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면 미소를 지었다. 14일 아웅산 수치 여사 지지자들이 몰려든 민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사에 갈 때는 묻지 않았는데도 택시기사가 먼저 “레이디(아웅산 수치 여사)가 풀려나 매우 기쁘다”며 말을 걸었다.

지지자들은 외신이라면 눈을 반짝였다. 누구든 미얀마 이야기를 해줄 사람, 외부 세계에 수치 여사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있다는 걸 고마워했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채 활짝 웃거나, “미디어, 미디어”라고 외치며 길을 비켜줬다. 14일 양곤 외곽 노스 오카라파 마을에서 만난 40대 주민은 NLD 당원도, 민주화운동가도 아니었지만 “레이디를 아주 좋아한다”며 외국인 기자를 향해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제한된 수준의 자유인지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NLD의 학생 조직 멤버인 코 코 지(가명)는 “외국인에게 친절한 미얀마인은 두 가지 부류”라고 설명했다. 첫 번째는 외국인을 믿는 부류, 두 번째는 정보원이었다.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하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억눌렸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불순한 외국인을 골라내 보고하는 정보원들도 도처에 깔려 있었다.

수치 여사 자택 앞에서 13일 만난 20대 미얀마 기자는 “여기 모인 사람 중 정부 측 정보원이 몇 명인지 모른다. 사진 찍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얀마 안내자는 “(사진 찍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알려준) 그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는 모를 일”이라고 했다. 한국인 교민도, 미얀마 학생 운동가도, 익명의 시위대도 “아무도 믿지 마라”는 말을 반복했다.

인터넷 사정도 좋지 않았다. 네이버 야후 구글 같은 포털 사이트가 열리긴 했지만 일부 외신 사이트와 미얀마 관련 외신 기사는 전부 차단됐다. 하루 몇 번씩 기습적으로 연결되는 구글 메일을 제외하면 이메일을 통한 외부와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호텔 객실 내 TV를 통해 13일까지 정상적으로 방영되던 BBC와 CNN월드뉴스는 14일부터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했다. 호텔 프런트에 “TV가 안 나온다”며 항의했는데 전화를 끊고는 금방 후회했다. 수치 여사가 등장하자마자 눈앞에서 TV 화면이 까맣게 바뀌었다. 5분 뒤 켜진 화면은 스포츠 뉴스가 나오는 20분간 멀쩡하다가 앵커 입에서 미얀마, 수치, 석방 같은 단어가 나오자마자 다시 까매졌다. 너무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것이다.

군부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미얀마 내부의, 혹은 미얀마와 외부 세계의 소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달러를 내고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는 선불 휴대전화 심(sim)카드는 판매가 중단됐다. 대신 50달러 이상 고가의 심카드만 허락됐다. 가난한 미얀마인의 통신 수단을 막은 것이다.

미얀마에 10여년 거주했다는 한 기독교 선교사는 “미얀마는 불교국가여서 교회를 운영하기가 어렵긴 하다. 나도 서너 번 교회 문을 닫은 적이 있다. 그래도 그건 해결할 방법이 있다. 하지만 정치 환경은 다르다. 훨씬 혹독하다”고 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