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문일] 박근혜, 城에서 나오기
입력 2010-11-15 18:03
차기 대선 경주에서 시작부터 지금까지 선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대통령과는 세종시 때문에 각을 세웠으나 8·21 회동 이후에는 국정운영에 협조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여유도 있어 보인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 같은 철 지난 개그를 새로운 것인 양 꺼냈다. 그래도 썰렁하지 않았던 것은 ‘박근혜가 개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뉴스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변했다. 왜 변했을까. 무엇이 변하게 만들었을까. 8·21 회동에서 차기 대선과 관련된 우호적 언질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우세하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전 대표의 높은 벽을 넘을 용자(勇者)는 나올 것 같지 않다. 2012년 대선은 ‘박근혜’라는 성을 함락하려는 공성전이 될 공산이 크다. 박 전 대표는 수성(守城)에 능하다. ‘약속’이라는 단어 하나로 세종시 수정안을 물리친 것을 보라. 방어전은 원칙을 지킬수록 승산이 높다. 병법에서는 성을 공격할 때 방어하는 쪽보다 3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공격하는 측은 기책(奇策)을 짜려고 애를 썼다.
경쟁자 도발에 낚이지 않되
그러나 방어만으로는 영토를 넓히지 못한다. 박 전 대표가 ‘슈퍼스타 K’의 장재인처럼 탈락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방어전의 소극성에서 비롯된다. 공격하는 자는 거칠다. 야만적이다. 차기 대선을 향해 급가속 중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눈빛을 보라. 일본 전국시대의 아라무샤(荒武者)와 노부시(野武士)가 연상된다. 아라무샤, 무용(武勇)은 있으나 예의와 멋을 모르는 무사. 노부시, 산야에 숨어서 패잔한 무사를 기습해 무구(武具)를 뺏는 무사.
공격자들은 박 전 대표의 주위를 맴돈다. 줄기차게 4대강과 감세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세종시에서 박 전 대표의 언령(言靈)을 충분히 이용한 터다. 심지어 외교통상부 민동석 차관 인사에 대해서까지 의견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코미디까지. 박 전 대표가 낚이면 좋고, 아니면 못먹는 감 찔러보기라도 한 게 된다. 박 전 대표가 대꾸를 않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시간이 갈수록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엮이면 자칫 낭패, 피하자니 소통을 거부한다는 인상을 준다.
드디어 박 전 대표는 15일 감세 철회 논란에 대해 “소득세 최고세율은 유지하고, 법인세 최고세율은 인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 소득세 법인세 모두 감세에 반대하는 공격자들의 입장에 반만 동의한 셈이다. 한나라당이 같은 기조의 감세수정안으로 방향을 잡은 터여서 공격자들의 기대는 빗나갔다. 외려 박 전 대표의 장기인 ‘원칙’이 나설 자리만 만들어 주었다. 법인세 인하 문제에 대해 “기업들이 법인세 인하를 염두에 두고 투자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변경하면 국내외 기업이 이미 세운 계획을 바꾸게 된다”며 ‘정부 정책의 일관성 유지’를 강조한 것이다.
지키기만 할 때 아님을 자각
박 전 대표의 다음 과제는 4대강에 대한 입장 표명이 될 것이다. 필자는 박 대표의 생각을 이렇게 읽는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치산치수(治山治水)는 국가의 기본이다. 아버지는 벌거숭이 산야를 지금과 같은 푸른 숲으로 바꿔 놓았다. 이 대통령의 치수 사업에 찬성한다.” 박 전 대표가 이렇게 말한다면 4대강 사업은 결정적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박 전 대표는 14일 ‘박정희 대통령 93회 탄신제’에서 한국의 발전상을 언급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더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대한민국’은 선거 슬로건으로도 안성맞춤이다. 박 전 대표가 최근 읽었다는 ‘창업국가’는 적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이 부존자원 하나 없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동인을 분석한 책이다. 한국과 이스라엘 모두 1948년에 창업한 국가다. 박 전 대표는 자신과 국가 모두 현재에 안주해 수성(守成)할 때가 아니라는 시사를 한 것일까?
문일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