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대영] 정의로운 사회 vs 공정한 사회

입력 2010-11-15 17:51


“국민이 진정한 권력의 갑(甲) 위치에 있을 때 공정사회는 창조될 수 있다”

‘정의’라는 큰 해일이 휩쓸고 지나가자 새로운 ‘공정’이 공정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바람직해 보인다. 다만, 일각의 우려를 전하고 싶다.

뒤돌아보자. 노무현 정부의 정의의 해일은 ‘친일인명사전’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의미하는 근현대사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을 말한다. 정의가 실패한 역사를 조금이나마 바로 잡아보겠다는 것이다. 그 ‘정의의 거울’에 비추어 역사를 재평가하다 보니 일제 강점기를 살다 가신 선배들은 죄다 독립운동가이거나 친일파로 양분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의 ‘공정’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공정은 사전의 의미로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읽힌다. 어느 청와대 대변인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회’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요약했다.

또 어느 사회학 교수는 ‘투명한 과정, 공평한 절차’를 말하면서 ‘모든 개인이 평등한 자유와 권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서의 차등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라고 해석한다.

모두 의미 있는 주장이다. 다만 추상적이다. 그래서 공정(公正)이 저마다 공정(工程)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공정한 사회가 가능할까. 도대체 뭐가 공정한 것일까.

간단하게 말해서 법을 준수하면 공정한 사회다. 그런데 그 법이라는 것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그렇다고 세상이 온통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의 기치는 자유, 평등, 박애다. 인간은 기실 자유로운 존재이되, 그냥 놔두면 그 ‘무엇’을 가진 자들이 강자의 법칙으로 휘두를 테니 모두에게 평등한 조건과 룰을 제시하여 만인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빈부가 생겨날 것이고, 결국 박애로 사랑을 나누며 공존하자는 것이다. 멀리 프랑스까지 갈 것도 없다. 단군 할아버지는 ‘홍익인간’을 말했다. 널리 두루 이롭게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 ‘정의’와 ‘공정’은 권력을 가진 자가 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장 낮은 자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의 정의와 공정이 참이다. 권력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를 말한다. 권력의 크기를 조정하면 공정사회가 될 수 있다. 권력의 갑(甲), 을(乙) 구조를 깨는 것도 그 하나의 방법이다. 모든 상거래에는 갑을 관계가 있다. 당연히 권력에도 갑, 을, 병, 정이 있다. 현대 복잡사회에서 어디 정까지만 있으랴. 무, 기, 경, 신, 임, 계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골품제도도 성골, 진골에서부터 나아가 향, 소, 부곡까지 나누었다.

흔히 권력의 갑을 대통령이 근무하는 청와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을은 각 부처다. 병은 우리 같은 산하 공공기관, 정은 공공기관과 협력하고 예산을 받아 집행하는 전국 규모의 협회, 단체 및 학회 등이다. 물론 그 협회와 단체들은 산하에 지부를 두고 있고, 그 지부는 각 회원들을 따로 거느리고 있다. 경제단체이든 문화단체이든 시민단체이든 구조는 다 똑같다. 이것이 권력의 피라미드 구조다. 위로 오를수록 자리는 좁아지고 영향력은 커지며,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람 수는 많아지나 가진 영향력은 소소해진다.

아래의 심정과 건의와 소원을 잘 들어야 제대로 된 공정사회가 창조된다. 개인 혹은 작은 단체들은 해당 관련 협회와 지부에 건의를 하고, 각 지부는 상급단체에 건의를 하고, 그 상급단체는 예산과 정책을 집행하는 공공기관에, 공공기관은 정책의 비전과 미션을 수행하는 해당 중앙부처에, 그리고 해당 부처는 국가의 정책을 총괄 집행하는 청와대에 그 애달픈 사연을 전달하여야 한다. 청와대는 신속히 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예산을 집행하되 때로는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 입법부와, 법 집행의 유연성을 위해 사법부와도 소통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권력은 선거 때만 국민에게 있는 게 아니라 선거 이후에도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국민은, 그리고 서민은 권력의 임, 계가 아니라 권력의 갑이다. 그래야 한다.

이대영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