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77)
입력 2010-11-15 13:05
서양의 코, 동양의 입
백두산에서 가져온 [애기물매화]를 선물로 받았다.
가을비가 뚝뚝 떨어지는 우산 밑으로 밥풀 너댓 개 붙여 놓은 것 같은 꽃을 건네주며 그는 말했다. “아마 남한 땅에서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꽃일 겁니다. 우리 농원에서 자라는 수백 가지의 백두산 식물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식물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는 다시 운두령에 가져다 놓아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선물로 준 게 아니라 잠시 빌려 준 게 되는 것이다.
콧대가 높다고 말한다.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개개인의 의지, 건방진 태도를 비아냥거릴 때 흔히 [콧대]라는 말을 쓴다. 코는 신체 중에서 솟아 나온 부분이다. 튀어나온 것이고, 딱딱한 것이며, 입체적인 문화의 상징이다. 자고로 콧날이 오뚝해야 한다. 그래야 미인이다. 코가 완성의 척도다. 이렇게 입체적이고 리얼리티를 갖는 코지만 그만큼 다치기 쉽다. 깨지기 쉽다. 그래서 코는 서양문화를 대변한다. 왜 아시지 않는가. 서구의 조각들이 하나같이 오뚝한 콧날로부터 시작되고, 서양 사람들을 ‘코쟁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애기물매화는 코가 없다. 전혀 입체적이지 않다. 튀어 나오지도, 솟아난 부분도, 오뚝한 구석도 없다. 그러니 전혀 서양적이지 않다. 근간의 어딜 가나 색깔과 모양을 뒤섞어서 만들어낸, 진짜인지 가짜 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식물들과는 아주 딴판이다. 애기물매화는 미소만 있다. 어딘가 미소를 내는 입술이 있을 듯도 한데, 꽃 전체가 작은 입술이다. 그렇지, 꽃이라고도 할 게 없는 아주 작은 물 매화의 전체가 입이다.
입은 코 하고는 반대다.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들어간 곳이고,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라 숨어 있는 부분이다. 움푹 패어 있는 것, 은은한 것, 부드러운 것, 이를테면 입술은 평면적이고 동양적이다. 그래서 우리 산천에 즐비한 석물(石物)들을 보면 코가 아니라 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코는 떨어지거나 깨지면 모든 게 상실된다. 그러나 입은, 아무리 세월의 풍상에 문드러져도 여전히 미소를 낸다. 참으로 가득 찬 긍지는 높은 콧대가 아니다. 저 바람과 비에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천년의 미소가 아닌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