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의 恨과 분노, “일본정부, 진심으로 사죄하라고 어디든 따라다닐 생각”

입력 2010-11-14 19:35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6일 20돌을 맞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화여대 윤종옥 교수 등 여성운동가들이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남성들이 성매매를 위해 한국을 찾는 이른바 ‘기생관광’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37개 단체가 모여 정대협을 발족한 게 1990년 11월 16일이었다. 지난 12일 위안부 할머니 4명이 모여 사는 서울 충정로의 쉼터 ‘우리집’에서 길원옥(83·사진) 할머니를 만났다.

◇“바느질 공장에서 돈 벌게 해준다고 해서…”=길 할머니는 열세 살이던 1940년 고향 평양에서 중국 만주로 끌려갔다. “공장에서 바느질 가르쳐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고 해서 따라갔지. 우리 같은 옛날 사람들은 철없고 순진해서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어.” 할머니가 살던 동네에서 서너 명의 또래 여자들이 같은 곳으로 보내졌다. 공장은 구경도 못했다.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하루 20명이 넘게 찾아오는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

“모르는 일본 남자들이 다짜고짜 옷을 벗기는 데 열두 살 열세 살짜리 여자애들이 뭘 할 수 있었겠어. 운다고 주먹으로 때리고 소리 지른다고 칼로 찌르고.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어.” 할머니는 6년 동안 만주와 북경 등으로 끌려 다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인천행 배에 몸을 실었다. 몸은 성병과 장티푸스에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역사는 그렇게 묻히는 게 아니다”=길 할머니는 “귀국 후 위안부로 끌려갔던 사실이 부끄러워 숨기고만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2002년 중반 우연히 TV에서 위안부 동료들의 활동 모습을 보고 수요집회에 참석하게 됐다. “나와 보니 피해자인 내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일본 정부가 부끄럽고 한국 정부가 부끄러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할머니는 이후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일본, 미국, 독일 등을 다니며 시위에 참여하고 증언했다. 2003년 7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최종 권고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우리만 없어지면 이 문제가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묻히는 게 아니야.”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수요집회는 오는 17일로 944차를 맞는다.

◇“진심으로 사죄하라고 죽는 날까지 따라다니고 싶었다”=234명이던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이제 82명만 남았다. “함께 싸우던 동료가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날 때는 정말 살이 도려져 나가는 것 같아. 그 무시무시한 일을 당하고서도 진실한 사과 한마디 못 듣고 죽는 게 얼마나 기가 막힌지….” 할머니는 눈가를 적셔오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사죄하라고) 내 생명 끝나는 날까지 어디든 따라다니겠다고 했는데 이젠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할머니의 가슴에는 우리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역시 한으로 맺혔다. “아직도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남의 아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다면 80∼90대 할머니들이 20년 동안 거리에 나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위안부를 위안부로 보지 말고 내 몸이라고, 내 집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본 정부에) 똑바로 요구하고 싸워줘야 이 일이 해결돼.” 할머니는 오는 25일 일본 정부와 국회에 ‘위안부 문제의 입법 해결을 촉구하는 50만 국민서명’을 전달할 때도 건강이 허락한다면 직접 일본에 갈 계획이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