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42) 600년 조선왕조 위엄 지킨 태조 어진
입력 2010-11-14 17:45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군주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 초상화와 비슷하지만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 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초기 공신상(功臣像)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랍니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고려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닥에 깔린 문양은 숙종 때까지 어진에 사용된 화법입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밝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얼굴은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해 살아있는 듯 그려냈습니다. 도톰하게 늘어진 귓불은 넉넉한 풍모를 상징하고요.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의 초상화는 모두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풍남동 경기전(慶基殿)에 소장된 어진(보물 931호·사진) 1점만 남아 있지요. 태조 어진을 그린 화가에 대한 기록은 없고 태종 11년(1410)에 처음 제작됐다가 영조 39년(1763)에 한 차례 수리를 거치고 나서 고종 9년(1872)에 어진도사(御眞圖寫)의 화사(畵師)로 활동한 조중묵이 모사한 것이랍니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은 1410년에 전주 경주 평양에 각각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御容殿)이라고 이름 지었답니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에 지은 것으로 전각 이름은 세종 때 붙였다지요. 태조 어진과 함께 건립된 경기전의 역사가 올해로 600년을 맞았습니다. 태조 어진은 약 100년마다 새로 제작하고 이전 것은 불태운답니다.
경기전에는 어진박물관이 들어서고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는군요. 어진박물관의 어진실은 태조 어진을 보관하는 곳으로 해마다 한두 차례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랍니다. 가마실에는 1872년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썼던 가마인 신연(神輦), 귀중품을 옮겨 싣는 데 쓰인 가마인 채여(彩輿), 조선시대 고관의 행차 때 사용했던 가마인 가교(駕轎) 등이 전시됩니다.
조선왕조 어진은 경기전의 태조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 및 철종 외에는 없는 실정입니다. 영조 어진은 ‘일호불사편시타인(一毫不似便是他人·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이라는 화론(畵論)을 엄격하게 적용한 점이 특징이지요. 또 철종 어진은 3분의 1이 소실됐지만 군복을 입은 임금의 초상화로는 유일하다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됩니다.
영조가 임금이 되기 전 21세 때 진재해가 그린 ‘연잉군초상’은 어진은 아니지만 정장 관복차림으로 18세기 초상화를 대표하는 기준작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 초상화 역시 가장자리가 불에 타 3분의 1이 소실됐지요.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 27대 임금의 그 많던 어진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6·25전쟁의 부산 피란길에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광형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