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이디가 풀려났다” 수천명 환호… 미얀마 수치 여사 7년만에 석방·대중연설 현장을 가다

입력 2010-11-14 19:37

지난 13일 미안먀 양곤 시내 한 허름한 아파트. 벽시계가 오후 1시를 향해 갈 무렵, 휴대전화가 울렸다. 통화를 마친 24세의 나잉(가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오후 2시. 가자(2PM. let's go)”라며 일어섰다. 나잉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다.

1989년을 시작으로 지난 21년 중 무려 15년을 투옥과 연금을 반복하며 살아온 민주화 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65) 여사. 2003년 세 번째 감금된 이래 지난 7년간 극도의 감시 속에 살아온 그녀가 이날 오후 2시 마침내 풀려난다고 했다.

나잉을 따라 20여분을 달려 도착한 잉야 호수변 수치 여사의 자택 앞 골목은 벌써 3000여명의 지지자들로 술렁이고 있었다. 오전 7시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40대 남성의 흰색 티셔츠에는 “수치 여사를 사랑합니다”라는 영문이, 또 다른 지지자의 셔츠에는 식민지 버마를 해방시킨 국부(國父)이자 수치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는 19세 청년 모(가명)는 “더 레이디(미얀마인들은 수치 여사를 영문으로 the Lady라고 불렀다)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심장으로 묶인 가족들”이라고 말했다. 5분, 10분, 30분, 다시 1시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섭씨 30도를 넘는 땡볕에 달구어진 흙바닥에서 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오후 3시로, 4시로, 또 5시로 석방 시간은 늦춰졌다. 지지자들의 표정도 기대·흥분과 실망·포기 사이를 오갔다. 2007년에도, 2008년에도, 그리고 지난해에도 군부의 석방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후 5시20분. 갑자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0m 앞에서 총을 멘 채 도열한 특수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철제 가림막을 치운 것이다. 지지자들과 외신 기자들이 1m쯤 벌어진 틈새를 뚫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더 레이디가 풀려났다”는 사람들의 고함이 들렸다. 옆에서 함께 달리던 나잉이 붉어진 눈으로 “못 믿겠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며 팔을 내밀었다.

100m쯤 달려 수치 여사 자택 대문 앞. 10분쯤 후 옅은 보라색 전통 복장을 입은 수치 여사가 대문 밖으로 나와 지지대를 딛고 올라섰다. 외신 사진을 통해 무수히 봤던 그 얼굴이 바로 3∼4m 앞에 있었다. 그녀는 고요하고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15년 고립 생활의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부서질 듯 작은 몸체에 손은 앙상했지만 건강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다. 누군가 꽃을 건넸다. 미얀마 독립의 상징이라고 했다. 수치 여사가 뒤로 묶은 머리에 꽃을 꽂았다.

거대한 고함 소리가 연좌한 지지자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수치 여사는 함성에 막혀 말을 못하다가 군중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돼 행복하다. 지금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야 할 때다. 국민 전체가 화합해 노력해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수치는 변호인과 자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지도부가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탄 채 집안으로 들어갔다. 정부 측 감시자들이 동행한 상태였다. 향후 일정을 논의한다고 했다.

수치 여사는 이튿날인 14일 낮 12시쯤 NLD 당사에서 대중연설을 재개하는 것으로 석방 후 첫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수천명의 지지자들에게 “민주주의의 근간은 표현의 자유”라며 “국민이 정부를 감독할 때 민주주의가 달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모든 민주세력과 협력하기를 희망한다”면서 “국민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구금상태로 지내게 한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은 없다”고도 했다. 수치 여사의 석방이 과연 미얀마의 민주화로 이어질 것인가. 지지자들은 곧 세상이 바뀔 것처럼 흥분했지만 이것이 본격적인 민주화의 신호탄이 될지, 지난 20여년의 반복이 될지는 아직 짐작하기 어렵다.

양곤=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