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판’이 바뀐다] 당당했던 미국이 이젠 ‘아쉬운 소리’하는 신세로
입력 2010-11-14 18:31
1박2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는 세계경제 질서의 지각변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미국의 리더십은 흔들렸고, 중국의 말은 무게감을 더했다. 이에 따라 달러를 대신할 새로운 기축통화체제에 대한 모색이 본격화될 조짐이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자본 유출입에 대한 규제’가 공동선언문에 명기됐다. 서울 G20 정상회의 이후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경제의 변화를 3회에 걸쳐 짚어본다.
① 흔들리는 미국 리더십
버락 오바마일까, 후진타오일까.
지난 11일 저녁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 환영만찬에 누가 가장 늦게 들어설 것인지를 두고 미국 대통령과 중국 국가주석 간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슈퍼스타가 쇼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하듯이 정상회담에서도 외교 의전상 서열이 가장 높은 정상이 마지막에 입장한다. 먼저 들어온 정상들이 자신을 환영해주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입장을 최대한 미뤘다. 만찬 직전 만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회담시간을 늘리고 숙소에서 출발 시각까지 늦췄다. 이 때문에 행사가 10분 이상 지연됐다.
미리 정해진 오바마 대통령의 입장 순서는 끝에서 4번째였다. 예전 같으면 미국 대통령이 예정보다 늦게 입장하는 것 정도는 눈감아 주는 게 관례였다. 초강대국이라는 위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만찬장에 마지막으로 들어선 인물은 중국의 후 주석이었다.
서울 G20 정상회의는 금융위기 이후 변화하는 국제질서를 보여줬다. 미국의 위축, 중국의 도약, 그리고 신흥국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왕따’ 당한 미국=G20 회의가 끝난 다음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G20이 미국을 따돌렸다(G20 shuns US)’였다.
원인은 역시 경제였다. 과거엔 튼튼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의 아쉬운 소리를 들어줬던 미국이 이번 회의에선 하소연하는 처지였다.
미국은 자신들이 달러 공급과 재정 지출을 늘리면서도 다른 나라에 화폐 가치 유지와 재정 적자 축소를 요구하는 이중적 행보를 거듭했다. 당연히 오바마의 발언에 무게가 실리기 어려웠다.
설광언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개발협력센터장은 “리먼브러더스 사태와 이번 양적 완화 조치로 세계 경제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이 다소 줄어든 것 같다”며 “미국 경제가 안정되면 다시 영향력을 회복할 것으로 보이지만, 공산권 붕괴 후 일국체제였던 것이 다국체제로 변해가는 과정이 진행 중인 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위력 과시한 중국=중국은 달라진 위상을 과시했다. 후 주석은 정상회의 석상에서 맞은편에 앉은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미국이 책임 있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난제였던 위안화 문제에서도 중국은 서방의 공격 화살을 피해갔다. 오히려 자신들은 여전히 신흥국이라며 투기적인 외국 자본으로부터 국내시장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1980년대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일본이 굴욕적인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치 폭등을 감내해야 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후 주석과 만난 각국 정상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을 늘려줄 것을 애원했다. 노련한 중국의 협상 전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차문중 KDI 연구위원은 “독일 영국 일본 등도 이해관계에 따라 중국에 힘을 실어줬다”며 “미국과 정치·경제적 견해가 다른 중국이 갑자기 성장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세계 동력, 신흥국=한국을 필두로 한 신흥국도 달라진 위상을 실감했다. 세계의 수출을 받아주던 미국, 기술과 자본으로 압도해온 유럽 등 선진국이 한계를 보이면서 신흥국이 세계 경제의 성장을 이끌 새로운 엔진으로 등장했다.
환율과 무역수지 등에서 책임이 커지기도 했지만, 외환 유출입 규제의 필요성을 인정받고 국제통화기금(IMF)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등 성과가 컸다.
현대경제연구원 이만용 연구위원은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와 자유무역의 혜택을 받은 신흥국은 노동력과 자본 축적 등 경제 요소에서도 경쟁력을 갖춰 선진국들도 이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라면서 “선진국이 독점해온 국제질서 주도권의 일부를 신흥국이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김지방 이용상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