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0-11-14 19:04
(20) 정면충돌
신학박사 선배가 성경 번역을 검토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번역을 볼 때 마가복음 8장 32절과 33절을 들춰본단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 이 두 절에 반복된 단어가 있다. 원어에서 같은 단어는 번역에서도 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게 좋다. 물론 다르게 옮길 수도 있다. 문맥상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거나 원어가 몇 가지 뜻을 갖고 있고 거기에 따라 다르게 옮겨야 할 때다. 개역개정판의 마가복음 8장 32∼33절은 이렇다.
32절: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원어에서 반복된 단어가 ‘에피티마오’인데, 32절에서는 “항변하매”로 33절에서는 “꾸짖어”로 번역되었다. 에피티마오는 아주 심하게 비난하거나 책망할 때 쓰인다. 예컨대, 예수가 사탄을 꾸짖을 때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의견 차이는 심각한 정도다. 한마디로 정면충돌이다.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오해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신다. 듣는 제자들 마음에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스승께서 그 무서운 십자가를 지신다니 말이다. 그래서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청 드린다. 제자의 정성스런 마음이다. 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인 베드로가 나서서 제자들의 이런 고운 심정을 전달한다. 다른 한편으로 스승 예수는 제자들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엄하게 꾸짖는다. 마음은 따뜻하지만 겉으로는 내내 엄격한 스승을 생각하면 된다. 누가 뭐래도 당신이 이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행여 만에 하나라도 제자들이 이 고난을 대신 받겠다고 나설까봐, 그런 마음을 애초부터 막으려고 ‘사탄아’ 하는 표현까지 쓰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상상해본 문맥 파악은 오해다!
사복음서에 나온 제자들 모습을 보면 자기 명예와 이익과 자존심에 민감했다. 마가복음에서 이 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을 헌신하려는 것보다 한번 출세해 보려는 동기가 더 강했다. 직장도 관두고 이런저런 것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런데 막판에 가서 이게 웬 일인가? 스승이 스타가 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지금까지 투자한 게 뭐가 되는가. 이건 심각한 상황이다. 예수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 예수 자신은 성자도 될 수 있고 영웅도 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위대하게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아주 막말로 하자면 이런 거다. ‘자기 혼자만 영웅 되고, 그러면 우리는 뭐야?’
지금 예수와 베드로는(베드로는 제자들의 집단이익을 대변한다) 정면충돌하고 있다. 영어성경 제임스왕역본(KJV)이나 엔아이브이(NIV)는 모두 32절과 33절의 에피티마오를 같은 단어 ‘rebuke’로 옮기고 있다. 나는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길을 따라가다가 이 부분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다는 게 때론 가장 가까운 사람들하고도 맞서게 될 수 있구나, 신앙인의 이기심이 종교적 형식으로 포장된 경우가 참 많겠구나, 예수의 길을 진지하게 따라가면 이런 포장이 폭로되는구나….
지형은 목사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