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상처와 풍경 짚어… 김훈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
입력 2010-11-12 17:28
결국 소설은 삶의 풍경에 대한 재구성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언어적 재구성이란 말과 상통한다. 소설가 김훈(62)의 신작 장편 ‘내 젊은 날의 숲’(문학동네)은 켜켜이 쌓인 언어적 지층을 가진 작가 자신이 소설 속 화자인 스물아홉 살 처녀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소설 외적인 형식에 눈길이 간다.
인생의 경험이 축적된 작가의 삶에 대한 만감이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과도하다고 할 만큼 수많은 상처를 동반한다. 그래서 작가가 느끼는 삶의 풍경과 상처는 스물아홉 살 화자가 감당하기엔 힘이 부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작가가 화자에게 어떻게 감당시키고 있는지가 이 소설을 읽는 또 다른 묘미인 것이다. 작가와 화자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나이 차이와 지적 능력과 체험 밀도의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김훈은 화자의 직업을 ‘숲 해설가’로 설정했다가 다시 ‘세밀화가’로 바꿨다고 하니, 집필 당시의 고뇌도 함께 살펴지는 게 이번 소설이다.
디자인 회사를 그만둔 ‘나’(조연주)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죄와 알선 수재로 징역 3년6개월에 추징금 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전직 군청 공무원의 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출옥하면 별거하겠다며 큰 아파트를 처분한 뒤 작은 아파트로 옮겨간다. 그럴 즈음, ‘나’도 동부전선 남방한계선 자등령에 위치한 수목원에 나무와 꽃과 잎을 그리는 계약직 세밀화가로 재취업해 민통선 마을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나’는 자신이 그려야 하는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을 통해 식물의 세계에 눈뜬다. 그건 식물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는 단순하면서도 이질적인 사실이다.
“줄기의 외곽을 이루는 젊은 목질부는 생산과 노동과 대사를 거듭하면서 늙어져서 안쪽으로 밀려나고, 다시 그 외곽은 젊음으로 교체되므로, 나무는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삶에서는 젊음과 늙음, 죽음과 신생이 동시에 전개되고 있었다.”(87쪽)
작약꽃 세밀화를 그리던 5월 ‘나’는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통해 수습된 유골들의 내부구조를 극사실화로 그려달라는 관할 부대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장 답사를 나간다. “아침에 그리려다가 못 그린 패랭이 꽃잎이 햇볕을 받으면 쟁쟁쟁, 환청을 울리듯이, 이 뼈를 그리려면 쟁쟁쟁 울리는 기운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172쪽)
‘나’가 식물학과 동물학이 섞여드는 생명 현상을 세밀화로 표현해야 하듯, 작가 김훈도 이 생명 현상을 언어를 통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부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투옥과 출옥 그리고 투병과 죽음을 통해 사람살이의 풍경과 상처를 구체적으로 짚어내고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고 말한 그의 첫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1994)의 소설적 진화이자 소설적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다.
“풍경은 미발생의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작가의 말’)
풍경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이라면 김훈은 왜 풍경에 대해 말하려는 것일까. 소설 속에 이에 대한 단서가 있다. ‘나’가 자신을 채용한 수목원 안요한 실장의 논문 ‘종자의 비밀’을 읽으면서 떠올린 상념이 그것이다. “나는 말을 해야만 살 수 있고 말로 해야만 안심이 되는 수목원 연구직 서기관 안요한 실장이 답답하고 가엾게 느껴졌다. 저 자신의 색깔로 이미 스스로 발현했는데 꽃이 그 발현의 배경에 대하여 입을 빌려서 무슨 할말이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의 유년을 경악케 했던 꽃의 비밀은 애초부터 인간의 말과는 무관한 것이고 그 비밀은 꽃의 내부가 아니라 안요한의 내부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83쪽)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아버지의 뼈를 자등령으로 가져가 산골한다. 희로애락 오욕칠정의 끈을 놓아버린 인간은 애초부터 말이 없는 풍경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말없는 곳에서 탄생해 말없는 곳으로 소멸해가는 생명의 순환 과정에는 언어 예술인 소설의 본질과 한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사유와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이 말해지는 현장이 김훈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