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셋 그들의 사진책엔 사진이 없다

입력 2010-11-11 17:53


사진·출판·디자인 세 노장 ‘거품의 시대’를 말하다

사진의 강운구(70), 출판의 이기웅(71), 북디자인의 정병규(65). 세 사람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그 분야를 대표하는 얼굴들이다. 자기 분야에서 한국적 이론을 개척해온 이론가들이기도 하다. 예술가보다 장인(匠人)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린다는 공통점도 있다.

셋이 모여서 책 한 권을 만들었다. 빛이 바랜 흰색 표지 위에 무표정한 검은 글씨 몇 자. 강운구가 쓰고, 정병규가 편집하고, 이기웅이 출판한 ‘강운구 사진론’(열화당)이다.

노장들

“책이 꼭 강운구처럼 생겼어요. 이렇게 손에 쥐면 강운구라는 사람이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아요.”(이기웅)

“얼른 보면 차가운 것 같죠? 그런데 재질이나 볼륨이나 종이를 보면 아주 따뜻해요. 그것도 강운구하고 똑같죠.”(정병규)

“정병규 최고의 북디자인이 나왔다, 그런 얘기가 들리던데요.”(강운구)

지난 8일 세 사람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출판사 열화당에 모였다. 출간 한 주가 지났지만 셋은 여전히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오후 4시에 시작된 책 얘기가 8시까지 이어졌다.

강운구는 사진을 찍으면서 꾸준히 사진에 대한 글을 써왔다. 그의 글을 모아 책으로 내겠다는 계획은 꽤 오래 전부터 이기웅 머릿속에 있었다고 한다. 한국 사진작가가 사진론을 쓴다고 할 때, 양이나 질에서 강운구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일은 올 들어서야 시작됐다.

정병규는 후반 작업에 가세했다. “정 선생, 껍데기(표지)는 만들어야지.” 그렇게 강운구가 정병규를 불러들였다. 정병규가 들어오면서 편집은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제목이나 표지는 물론이고, 책의 성격이나 원고까지 다시 검토했다. 출간 일정은 자꾸 미뤄졌다.

1970년대 초반부터 출판사 편집자와 사진기자(강운구)로 만나 어울려 다녔다닌 세 사람은 그동안 몇 권의 책을 같이 만들었다. 한국 사진집의 고전이 된 ‘경주남산’(1987년)도 세 사람의 합작품이다.

칠십 전후가 되어 다시 뭉친 세 노장은 서서히 책의 밀도를 높여나갔다. 때로는 서로 부딪혀 불꽃이 일기도 했다.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죠. 우정을 갖고 벌이는 노장들의 용호상박! 이 양반(강운구) 얼마나 고집이 세요. 이 양반(정병규) 고집도 만만치 않고. 우리 셋 다 책의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들이고, 강운구 책이니까 더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죠. 제가 중간에서 중재를 많이 했어요.”(이기웅)

“가장 다툰 게 제목이에요. 강 선생이 처음부터 제목을 가지고 있었어요. ‘짧거나 긴’. 그런데 그 제목을 쓰면 에세이집이 된다고 봤어요. 저는 이 책을 사진가가 쓴 사진론의 대명사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제목을 바꿔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죠.”(정병규)

강운구가 직설적이라면 정병규는 논리적이다. 이기웅은 시종 애매모호하다. 제목은 결국 강운구가 양보했다. 그렇게 책이 나왔다. 강운구의 책이되, 강운구만의 책이 아니었다. 세 사람 다 자기 책이라고 말한다.

우정

이기웅은 책 첫 장에 서문을 직접 썼다. 거기서 “사진이란 기록하는 것이며 사진의 본령은 사실적 기록에 있다는 당연한 명제를,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사진작업의 뿌리로 깊이 내려,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담담하게 나아갔다”고 강운구를 소개했다. 한국 사진작가 1세대인 강운구는 평생 다큐멘터리 사진을 고집해 왔다. 그의 대표작 ‘경주남산’ ‘마을 삼부작’ 등은 고스란히 한국 사진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강운구는 빼어난 문장가이기도 하다. 정병규는 “강운구는 ‘밥 사진론’을 통해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적 대답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강운구는 “평생 이기웅의 그늘에서 잘 놀았다”고 말한다. 그보다 한 살 위인 이기웅은 “강운구를 떠받들고 살아온 게 우리들의 우정이었다”고 되받는다. 둘은 작가와 출판인, 사진과 책의 아름다운 조합을 보여준다.

이기웅이 대표로 있는 열화당은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말(言) 장사는 시장 바닥에다 파는 게 아니다. 역사에다 파는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기다릴 줄 아는 출판” “절제된 출판”도 그의 단골 레퍼토리. 세계 유일의 책 도시라는 파주출판도시를 만들었고, 21년째 파주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병규는 국내 1호 북디자이너. 편집을 포장이라고 여기던 시절, 편집을 저자와 내용, 표지, 서체, 종이, 장정 등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맺기로 재규정하면서 편집에 디자인 개념을 들어앉혔다. 편집 요소들의 관계와 맥락을 예민하게 따져서 그 책에 꼭 맞는 모양새를 찾아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종종 유행과 반대로 가는 파격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이름을 내걸고 전시회를 여는 유일한 북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이기웅은 정병규를 “책을 위해 태어난 사람, 책의 완성도를 향해 몸부림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강운구가 “남 얘기 말라”고 핀잔을 준다.

“셋이 일본에 가끔 가요. 가면 고서점에 들르거든요. 두 양반은 눈에 불을 켜고 책을 찾아요. 온종일 서점에서 안 나와요. 둘이 막상막하예요. 누가 더 책벌레인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날 공항 가는 택시 타려면 두 사람 가방은 못 들어요. 책으로 가득 차서 가방이 무슨 쇳덩이 같아요.”(강운구)

거품의 시대

대가들 솜씨라는데 책은 휑하니 비었다. 저자가 사진가에 제목도 분명 ‘사진론’인데, 책에서는 사진 한 장 볼 수 없다. 표지는 저자 이름조차 생략했다.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두드러져 보이는 책이다. 뒷면은 그냥 백지. 지독하게 절제했다. 여기가 바로 세 거장이 만나는 지점이란 걸 알겠다.

“책이 너무 많아요. 무조건적 생산이라고 할까요. 말도 안 되는 책들을 만들어 내고, 엉터리들이 대접을 받아요. 사진이든 책이든 디자인이든 뭘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해야 되겠다 싶어요. 문화 생산에서 절제심이 없는 게 큰 문제예요. 책을 덜 만드는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미쳤다고 하겠지만.”(이기웅)

“사진가와 사진의 인플레 시대죠. 그렇지만 유니크(unique)하고 고요한 사진은 오히려 드물어졌어요. 사진의 힘은 더 약해졌고. 사진이 장식으로, 간식으로 떨어졌어요. 초기 다큐멘터리나 스트레이트 사진의 힘은 막강했어요. 지금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진들만 넘쳐나요. 다들 유행을 따라다니는데, 유행은 끝나면 촌스러워지고 말아요.”(강운구)

“지금 문화 생산 현장에는 ‘왓(what)’이 아니고 ‘하우(how)’만 작동하고 있어요. 예술이 고유의 캠프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낍니다. 얼마 전에 외국의 젊은 디자이너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본질적이고 원칙적인 부분에서 자기 얘기를 출발시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문화생산자들은 자기 영역이나 일의 기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왓’으로 돌아와야 해요.”(정병규)

출판인 이기웅은 책을 덜 내자고 주장하고, 사진가 강운구는 사진 책을 내면서 사진을 한 장도 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북디자이너 정병규는 책 표지에서 제목과 출판사 이름만 남겨놓고 모두 지워버렸다.

요란한 표지에 띠지까지 두른 책들 속에서 ‘강운구 사진론’은 홀로 고요하다. 그 고요함은 무기력하지 않고 날카롭다. 누구든 ‘오버’하고 뭐든 넘쳐나는 이 거품의 시대를 향해서 덜어내는 것, 절제하는 것, 후퇴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듯하다.

현역

강운구는 요즘도 사진을 찍는다. 매달 한두 번은 지방을 돌며 촬영한다. 요즘 뭘 찍느냐고 물었다.

“옛날만큼 성과가 없어요. 뭔가 새로운 게 눈에 띄지 않아요. 그 전의 작업을 되풀이할 수도 없고. 열심히 댕기긴 하는데.”

이기웅은 근래 고(故) 한창기 선생을 자주 떠올린다고 한다. 잡지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등을 발행했던 이다. 그의 서재에는 고인이 만든 ‘민중대사전’ 스무 권이 나란히 꽂혀 있다. 그 책들을 뽑아 보이며 말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책이에요. 이제는 이런 출판인이 다 사라졌어요.”

정병규는 최근 신문사에서 편집 실무를 경험했다. 그는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정병규 출판디자인은 신문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요즘도 외국을 드나들며 서점 순례를 하고, 외국 신문들을 들여와 연구한다.

셋은 여전히 현역이다. 근래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기술의 도전이라는 주제가 자주 올라온다. 디지털 기술의 도움으로 누구나 사진을 찍고, 디자인을 하고, 출판을 하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양적 팽창 속에서 질에 대한 고민이 실종됐다. 예술이 장인은 없고 얼치기들만 노는 판이 돼선 안 된다, 그게 고민되는 것이다.

강운구는 책에서 “테크놀로지가 장인적인 솜씨를 몰아내고 확산시키는 것은 평준화된 기교일 터다. 평준화라는 것은 마침내 퇴행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썼다. 정병규도 “내공이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주 무시무시할 정도”라며 “기술 때문에 책이 무엇인가, 디자인이 무엇인가, 사진이 무엇인가, 아주 혼돈스러운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세 노장이 만든 책은 표지판이었다. 책은, 사진은, 디자인은, 이 쪽으로 가야 한다고 가리키는.

파주=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