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시선] 자유시장주의의 미래
입력 2010-11-11 17:46
2008년 9월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지난 30여년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자유시장주의의 종언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자유시장주의 이론을 따라 규제를 완화했다가 인류역사상 1929년 대공황 다음으로 큰 경제적 재앙을 맞았으니, 그 이론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오산이었다.
1980년대부터 30여년간 우리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무엇보다도 엄청난 금력, 그것으로 사들인 정치권력, 그리고 학계와 언론에서 제공하는 막강한 지식권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이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자유시장주의의 공신력이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여러 나라에서 과거 30여년 동안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이끌어 온 유력 인사들이 청문회를 통해 문초를 당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후광이 사라졌다. 그리고 자유시장주의의 폐해가 크게 드러나자 이전에 그를 신봉하던 사람들도 의견을 많이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전까지만 해도 자본시장 개방의 전도사였던 국제통화기금(IMF)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상당 정도의 자본 통제를 용인(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이 그 큰 예다.
그러나 대부분 나라에서 그 강도가 약화됐다고는 하나 자유시장주의적 정책 기조가 계속되고 있다. 금융위기 초기에는 세계 각국 정부들이 금융 규제정책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성에 동의하는 듯했지만, 대부분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고, 미국같이 개혁이 어느 정도 이뤄진 나라에서도 그 강도가 생각보다 미약했다. 정책 개혁이라는 것은 항상 시행령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제대로 집행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데, 미국은 금융기관들에서 이미 의회 의원 1인당 4명에 해당하는 로비스트들을 풀어 시행령을 최대한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틀려고 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재정 정책에 있어서도, 금융위기 초기에는 과거 자유시장주의 신봉자들을 포함해 대부분 사람이 그 동안 죄악시하던 케인스주의적 적자재정 정책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적자재정에 힘입어 수요가 지탱되고 그에 따라 경제가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균형재정론을 내세우며 정부 재정적자를 하루라도 빨리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유럽 여러 나라, 특히 영국에서는 복지국가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재정적자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제대로 된 정치적 논쟁도 없이 복지지출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사고는 금융기관들이 쳤는데 그 보상은 일반 국민, 특히 복지 의존도가 높은 빈민들이 하게 되는 격인데도 프랑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국민들도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가면 세계는 다시 자유시장주의로 회귀하는 것일까? 결국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 편을 드는 이론이 승리하게 돼 있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속단이다.
우선 이번 경제위기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부분 나라에서 경제의 수축이 멈췄다고는 하지만 세계경제는 아직도 지뢰밭이다. 많은 나라에서 경기 회복세가 아직 미약하다. 그리고 애초에 이번 금융위기를 가져온 소위 ‘독성 자산’들이 아직 대부분 해소되지 않았다. 선진국들이 초저금리 정책을 쓰면서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후진국 시장으로 막대한 자금이 유입돼 자산 거품이 커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터지게 되면 또 큰 문제가 생긴다. 그리스나 영국과 같이 급격히 재정적자를 감축하려는 나라들은 소위 ‘더블딥(경기의 이중침체)’을 경험할 확률이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이미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위험 요소들이 겹쳐서 터지기라도 한다면 세계 경제가 다시 악화될 수 있다.
수십년간 세상을 지배해 온 이념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다. 대안의 개발과 실험에 시간이 걸리고,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기존 이론으로 득을 보는 사람들이 그 변화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사실 1929년 대공황 때에도 자유시장주의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공황이 3∼4년 지속되고서야 미국의 뉴딜, 스웨덴의 복지국가 모델 등 대안적 정책이 나왔다. 19세기식 자유시장주의를 뛰어넘는 소위 혼합경제 모델이 세계적으로 확립된 것은 대공황 후 20년 가까이 지나고 2차 대전까지 겪고서였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시장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틀림없다. 우선, 이번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자유시장주의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이기 때문에 이번 위기가 자유시장주의 이념에 주는 타격이 엄청났다. 또 지금까지 이뤄진 금융개혁들이 아무리 미흡하다고 해도 앞으로 상당한 정도의 금융개혁이 이뤄질 것이고, 이에 따라 과거와 같은 무제한적 금융자유화에는 제동이 걸릴 것이다. 이에 더해 앞으로 최소한 몇 년간 세계경제가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 정치적 지형이 점점 시장주의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속에서도 시장주의 이념을 고수하려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신들의 물적 이해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시장주의에 너무 익숙해져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해서 그럴 수도 있고, 시장주의 이념의 전도사로 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지금 필요한 개혁을 반대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망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를 진정으로 지키고 싶다면, 그것이 무조건 최고라고 선전하는 것보다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
‘장하준의 시선’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