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에서 기술로 밥맛도 전문가 시대… 밥맛의 달인 ‘밥 소믈리에’ 1대 1.3 비밀

입력 2010-11-11 17:58


아버지는 늘 흰 쌀밥만 고집한다. 간혹 현미밥, 잡곡밥, 콩밥이 식탁에 오르면 아버지는 밥에 섞인 콩이며 팥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현미를 먹으면 살이 빠진다더라, 잡곡밥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다더라. 남들 하는 얘기 모르는 건 아니지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늘 잡곡밥을 거부하게 했다. 밥공기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위로 봉긋 솟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흰 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싶었던 소년은 세월이 지나서도 쌀밥만 찾았다. 어머니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서 저소득층에게 무료 배급되는 옥수수빵을 얻어먹었는데 그 옥수수빵이 늘 먹는 쌀밥에 고기반찬보다 맛있었다는 어머니는 밥에 관한 트라우마가 없다. 밥을 남기면 안 된다, 꼭 흰 쌀밥이어야 한다는 고집도 당연히 없다.

장가간 아들에게 밥은 ‘남자의 로망’이다. 총각 때는 아침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나니 그렇게도 아침밥이 먹고 싶다. 그것도 꼭 마누라가 차려주는 아침밥으로. 그러나 장가간 지 10일도 채 되지 않아 그것은 한낱 희망사항이란 걸 알아차렸다. 1980년대에 태어난 딸에게 밥은 ‘그냥 밥’일 뿐이다. 스파게티, 빵, 피자로도 대체가 가능하다.

그렇다. 밥이란, 밥을 먹는 이가 살아온 시간과 인생이 풀어가는 스토리다. 누군가에게는 상처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위로다. 글래머 몸매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밥 한번 먹자”며 전기밥솥을 광고하는 가수 이효리. 그녀의 말마따나 밥은 사귐이고, 대화다. 누구와 얼마나 자주 그리고 길게 밥을 먹었는지는 친밀함의 바로미터다.

그러나 한 그릇 ‘밥’이 담는 깊고 풍성한 의미에 비해 생활에선 얕고 하찮은 것으로 통할 때가 많다. “쟨 내 밥이야”라고 할 땐 이용당하는 대상, “밥맛없다”는 아니꼽다는 뜻, “제 밥그릇만 챙긴다”는 자기 이득만 챙길 때 쓰는 말이다. 주방에서도 밥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다. 반찬을 조리고 볶고 무치거나 데치는 방법은 수천, 수만 가지에 이르지만 밥 만드는 과정은 거의 같다. ‘찬 물에 쌀을 서너 번 씻어 전기밥솥에 넣고, 손을 넣어 손등이 잠길 만큼 물을 붓는다.’

그러나 반찬을 실컷 만든 뒤에야 밥솥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면, 그래서 주린 배를 붙잡고 뒤늦게 밥을 안친 뒤 전기밥솥 타이머만 뚫어져라 쳐다본 적이 있다면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거다. 밥은 메인 요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이드 요리도 아니다. 밥은 밥상을 완성하는 마침표다.

밥에도 품격이 있다

제대로 된 밥맛은 한 끼 식사를 좌우한다. 산지나 생산 시기, 밥 짓는 기술에 따라 밥맛도 천차만별. 하지만 이를 제대로 가늠하는 건 쉽지 않다. 이 미개척 분야를 정복하겠노라고 세 사람이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달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밥 소믈리에’ 자격증을 취득한 삼성 에버랜드 푸드컬처 사업부 이승재(35) 대리, 김정순(40) 과장, 여경엽(29) 조리사가 그들이다. 밥맛도 기술인 시대를 세 사람이 열기 시작한 것이다.

밥 소믈리에. 이 생소한 직업은 밥 짓는 기술, 영양학적 지식 등을 갖춘 밥 전문가다. 다양한 품종으로 지어진 밥의 맛과 향, 찰기 등을 구분하는 실기와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일본 취반협회가 2006년부터 실시한 시험으로 현재까지 약 400명의 소믈리에가 배출됐다. 농학박사이기도 한 이 대리를 지난 5일 만났다.

-밥 소믈리에, 이색적인 직업입니다.

“푸드컬처 사업부 업무가 급식 사업인데 사업장마다 환경이 다르고, 밥 만드는 사람이 다르다 보니 밥맛에 편차가 생겨요. 밥맛을 끌어올리면서도 어디서나 동일한 맛을 내는 밥 레시피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밥 소믈리에 자격증에 도전한다고 했더니 ‘그거 따면 뭐 할 건데’ 그런 분들도 계셨어요(웃음).”

-다른 질문은 필요없겠죠. 밥 짓는데 특별한 비법이 있나요?

“우선 좋은 품질의 쌀이 필요해요. 도정한 지 오래된 쌀일수록 수분이 증발하고 냄새가 나요. 도정 시기를 꼭 확인해야 하고요. 쌀 씻을 때 처음부터 오래 씻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쌀을 처음 씻을 때 속도가 빨라야 해요. 백미에 묻은 쌀겨를 떨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첫 물은 신속하게, 두 번째 쌀 씻을 때부터 꼼꼼하게. 도정 일자에 따라서 씻는 방법도 달라집니다. 오래된 쌀일수록 조금 더 오래 씻어주세요. 묵은 쌀은 표면에 산패한 지방이 묻어 있는데 그걸 벗겨내야 냄새가 사라지거든요. 씻고 나면 불려야 합니다.”

-흰 쌀밥도 불려요? 전 잡곡밥도 물에 불리지 않고 바로 전기밥솥에 안치는데.

“불린 쌀로 밥을 하면 시간이 오래 지나도 촉촉함이 유지됩니다. 반면 생쌀로 밥을 하면 맛이 금방 떨어지고 딱딱해지죠. 생쌀의 경우 쌀과 물의 중량은 1대 1.3입니다. 불린 쌀은 1대 1. 씹었을 때 단맛이 나야 하는데 싱거운 밥이 될 때도 있잖아요? 쌀 불린 물을 버리고, 새 물을 쓰는 경우예요. 쌀 불린 물에 단맛이 들어있는 거죠.”

-요리에 따라 물 중량도 달라지겠죠?

“그렇죠. 불린 쌀 기준으로 얘기할게요. 일반 백반은 쌀과 물이 1대 1이지만 덮밥은 1대 0.9, 볶음밥은 1대 0.7입니다. 참고로 김밥이나 초밥은 밥에 간을 하는 타이밍도 중요해요. 밥이 갓 지어졌을 때 온도가 약 90도인데 바로 식초를 넣으면 고르게 스며들지 않아요. 밥이 50도까지 식었을 때가 가장 적당합니다.”

-저 같은 ‘귀차니스트’는 좋은 밥맛을 내기 힘들겠군요. 쌀 불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요?

“가정집은 겨울에도 춥지 않기 때문에 보통 60분입니다. 손을 물에 담갔을 때 체온보다 약간 차가운 경우죠. 반면 사업장은 겨울에 5도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최대 120분이에요. 추울수록 수분 침투가 느리니까요.”

밥 소믈리에, 주방에서 만나다

지난 9일 오후 ‘밥의 장인’ 여경엽 조리사를 만나러 경기도 용인시 마북동에 있는 삼성 에버랜드 푸드컬처 사업부를 찾았다. 이날 아침에 직접 지은 밥을 들고서. 약간 노르스름한 빛깔의 밥을 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백미 맞아요? 햅쌀로 밥 한 거예요?” “쌀 봉지에는 햅쌀이라 적혀 있던데….” “이렇게 노란 건 햅쌀 아닐 확률이 높아요. 아니면 도정이 덜 됐거나.” “도정 일자는 확인했죠?” “제대로 안 봐서….” “그런 건 확인해야죠.”

그는 식은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압력밥솥으로 밥 했죠?” “네. 압력 전기밥솥이요.” “압력밥솥이 좀 그래요. 높은 압력이 쌀 표면에 있는 전분 세포를 터뜨리기 때문에 금방 먹었을 때는 존득존득하게 찰기가 괜찮죠. 시간이 지나면 씹을 때 치아에 밥알이 쩍쩍 달라붙어요. 이런 밥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밥알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봐요, 밥알끼리 풀처럼 붙잖아요. 수분은 괜찮네요. 지금은 식어서 괜찮은데 밥을 막 했을 때는 질척거렸죠?” “아침에 먹을 때는 별로였어요.”

평가를 마친 여 조리사가 직접 밥을 안쳤다. 쌀 씻는 손 모양새가 달랐다. 쌀을 두부나 달걀을 쥐듯 부드럽게 잡았다, 놨다 반복했다. “이건 햅쌀이기 때문에 세게 문지를 필요 없어요. 너무 세게 잡으면 쌀알이 깨지거든요. 쌀은 생각보다 민감해요.”

그는 한 번 씻은 쌀을 소쿠리에 옮겨 물을 완전히 뺐다. “씻은 물을 대충 따라 버리고 또 거기에 새 물을 받아봤자 더러운 물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에 깨끗하지 않아요. 첫 물은 완전히 제거하는 게 좋습니다.”

씻은 쌀은 60분 동안 불렸다. 투명했던 쌀은 수분을 머금으면서 눈에 띄게 통통해지고, 유백색을 띠었다. 30분 후 전기밥솥에 밥이 완성됐다. 푸드컬처 사업부 식품연구소에서 쓰는 전기밥솥은 취사, 보온 버튼밖에 없는 저렴하고 오래된 제품이었다. 이런 밥솥으로도 제대로 된 맛이 나오나, 솔직히 반신반의였다. 한입 떠서 입에 넣었다. 통통한 밥이 한 알 한 알 입안에서 살아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설익은 밥은 전혀 아니었다. 씹을 때는 톡톡 터지는 식감이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먹은 밥 중에 제일 맛있어요.” 매섭기만 했던 여 조리사가 처음 싱긋 웃었다.

산업이 된 밥

일본에서 밥은 하나의 산업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취반 산업은 ‘즉석밥’에 국한된 얘기다. 일본 도시락이나 급식업체는 반찬만 만들고, 밥은 따로 만들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대신 급식 업체는 취반 공장에서 만든 밥을 구매해 소비자에게 내놓는다. 분업이 이뤄지는 것이다.

“1인 가구가 늘다 보니 직접 밥을 하기보다 사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어요. 자연스럽게 따뜻한 밥을 지어먹을 기회는 줄지만, 밥맛에 대한 욕구는 여전히 높죠. 일본은 포장 용기도 발달했어요. 용기에 뜨거운 밥을 담아 뚜껑을 닫으면 뚜껑에 물이 맺히고, 그 물이 다시 밥에 떨어지면 질척해지잖아요. 그걸 방지하기 위한 포장 용기도 개발된 거죠.”(이승재 대리)

한국도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일본처럼 취반 산업이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품질의 표준화된 밥맛이 편의점이나 급식업체에서도 보장될 것이다. 표준화된 밥맛만큼 밥상을 둘러싼 스토리마저 표준화되는 건 아닐까, 별별 생각이 들다 취재가 끝났다.

용인=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