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진영] KBS와 김미화의 경우
입력 2010-11-10 18:10
“물의 빚고도 진솔한 사과없이 블랙리스트 파문을 마무리짓는 경박한 태도”
KBS와 방송인 김미화씨에게 시청자와 팬, 나아가 국민은 어떤 존재인가. 방송 출연 금지 대상자, 이른바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를 둘러싼 양측의 다툼이 마무리되는 과정을 보면 씁쓸한 느낌이 든다.
KBS는 지난 9일 김씨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를 취하했다. KBS는 “애초 김미화씨 개인에 대한 대응 차원이 아니라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받기 위해 고소를 제기한 것이었으며 이제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판단해 고소 취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리고는 그날 밤 9시 메인 뉴스 끝 부분에 앵커 멘트로 이 같은 사실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KBS는 또 “김씨 측은 사회적 파장에 대한 유감과 함께 불필요한 오해가 확대되지 않길 바란다는 뜻을 트위터를 통해 밝힐 것”이라고 전했다.
KBS의 언급대로 김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127일 만에 다행스럽게도 KBS가 먼저 고소를 취하했다”며 “‘KBS에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밝혀주십시오’라는 언급 때문에 사회적 파장이 일어나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KBS도 저도 이번 일로 상처를 많이 입었다”며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저도 KBS도 그만큼 성숙해졌으리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4개월 이상 끌어오던 KBS와 김씨 간의 블랙리스트 갈등이 봉합됐다. 그동안 영등포경찰서에 네 번이나 불려 다니면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었을 김씨는 오랜만에 느긋한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됐다. KBS 역시 한 연예인을 상대로 한 형사 고소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터라 이제 중압감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시청자와 팬, 국민들은 어떨까. 시청자이자 팬이며, 그리고 국민의 한 사람인 나는 찜찜하다. 남의 송사가 더 이상의 악다구니 없이 화해로 끝을 본 만큼 덕담을 보태야 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다. 양측의 ‘어색한 악수’로 싸움은 끝이 났지만 결론은 오히려 모호하다. 블랙리스트가 있단 말인가, 없단 말인가. 이들의 해명은 안개를 더 짙게 뿜는다.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KBS의 입장은 ‘허공에 주먹질’이다. KBS가 말하는 사회 구성원은 누구이고, 공감대는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됐나. 블랙리스트가 없다고 확언하고 싶지만 에두를 수밖에 없는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뜻인가. 김씨는 한술 더 뜬다. 구체적 언급은 없고 오히려 스무고개를 낸다.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뉘앙스 같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 선문답 같은 해명의 끝은 ‘더 성숙해지겠다’는 다짐이다. 다시 한번 묻는다. 블랙리스트는 있나, 없나.
하지만 나는 이번 사안의 본질은 블랙리스트 유무가 아니라 양측의 경박함이라고 본다. 김씨는 더 이상 ‘순악질 여사’의 숯검댕이 눈썹 여자 코미디언이 아니다. 이름 앞에는 ‘방송인’이라는 사회적 계급장이 붙는 공인이다. 외부로 직통되는 발언은 한마디가 천금 같아야 했다. 특히 ‘사실’을 언급할 때는 ‘책무’를 의식해야 한다. 그의 말은 사람을 웃기기 위한 코미디언의 발언이 아니다.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힘과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알아야 함에도 신중치 못한 처신으로 본인은 물론 사회 곳곳에 생채기를 냈다. KBS는 걸핏하면 자임하는 매체 영향력 1위의 권위를 스스로 팽개쳤다. 문제가 불거지자 즉각 고소장을 제출했다. 원인을 따져보고 본말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다. 우선 외부의 힘을 빌려 상대를 압박하고 제압해보자는 자세였다. 스스로가 거대한 공권력인 KBS가 한 여성 연예인을 상대로 무력시위를 했다.
양측은 이제 홀가분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전말을 지켜본 나는 개운치 않다. 소동을 일으킨데 대한 진솔한 사과가 없기 때문이다. 싸움을 한 사람보다 싸움을 말린 당사자가 더 멋쩍은 모양새다. 김미화씨가 출연하고 KBS가 만든 한편의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정진영 카피리더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