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악성 뇌종양 딸을 위한 엄마의 기도

입력 2010-11-10 18:10


[미션라이프] “엄마, 내 곁에 있어줘요. 나, 정말 너무 힘들어요.”

‘쿵! 와르르∼’ 심장이 먹먹하고 귀가 멍했다. 국악인 이윤경(43·국악방송 심의실장 겸 문화사업팀장)씨는 지난 여름 난생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씨의 큰 딸 도혜인(15) 양이 던진 한 마디 때문이다. 딸을 키우면서 15년 3개월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딸은 아빠를 닮아 의젓하고 믿음직스러웠다. 늘 일에 파묻혀 사는 엄마의 건강을 염려했다. 연년생 여동생에게 김밥을 싸주고 국수를 삶아줄 정도로 책임감과 우애가 남달랐다. 중학교 땐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올해 자립형사립고교로 전환된 서울 목동 한가람고등학교에 1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할 때까지만 해도 ‘엄친 딸’이었다.

하지만 딸은 단 한 번도 이 학교 교복을 입지 못했다.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복 대신 환자복을 입고 뇌종양 중에서도 아주 희귀한 ‘다형성 교모세포종’과 1년이 넘게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 종양은 현대 의학으로는 완쾌하기 어려운 난치병 중의 하나다. 아주 공격적이라 과감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재발을 잘 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의사들은 말한다. 이씨도 어느새 전문가 수준이 됐다.

“뇌에 생기는 종양 중에서 아주 나쁜 놈이죠. 일반적으로 이 뇌종양에 걸리면 1년 정도의 생존을 예측할 수 있으며 아무리 치료를 열심히 해도 9개월 이상 살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해요. 하지만 최근엔 신약의 개발로 인해서 조금의 생존이 길어지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어요.”

서울대 국악과(해금) 출신인 이씨는 우리 전통 음악을 살리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 중독자였다. 딸이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 탓이라고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입학식 때도 직장에서 일 하느라 딸의 학교에 가본 적이 없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욕심이 많은 아이죠.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도 많은 이팔청춘인데…. 병든 사람을 보면 의사가 될 꿈을 꾸고, 가난한 이들을 만나면 은행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장애인들 앞에서는 자원봉사자가 되겠다는 다짐도 했어요. 혜인이 ‘꿈의 노트’엔 변호사가 돼 소외받는 이들을 부축하겠다는 소망도 들어 있어요.”

혜인양은 투병 중에도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아동을 돕는 후원금을 끊지 않았다. 2년 째 용돈을 아껴 월 5000원씩 유니세프에 후원금을 내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돕고 있다. 올 봄엔 광화문에 책을 사러 갔다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이 펼치고 있던 네팔 어린이 돕기 후원자 모집에 선뜻 사인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까지 여느 집 못잖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딸이 중간고사를 마친 날이었다. 눈이 침침하고 어지러우며 팔이 저리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엄마는 시험공부 때문인 줄만 알았다. 한의원에 갔더니 1∼2주 정도 물리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해 안심했다. 여학생들이 겪는 생리통의 일종이려니 생각하고 미국과 영국 출장길에 올랐다. 딸은 엄마에게 신경외과에 갔더니 목 디스크의 일종이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무심한 게 죄였을까. 20여 일간 외국 출장을 다녀오는 사이 딸은 많이 아팠다. “여보, 혜인이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심상찮아…” 매사에 느긋한 편인 남편도 이번엔 달랐다. 동네 대학병원에서 컴퓨터단층촬영(MRI)을 했더니 뇌종양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믿을 수가 없어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다.

“뇌종양입니다. 위치가 너무 안 좋아요. 호흡을 좌지우지하는 뇌간이라 수술이 어렵습니다. 방사선 치료와 동시에 함암제를 복용해야 합니다만….”

지난해 11월5일. 결과는 더 안 좋았다. 담당 의사는 이대로 두면 1∼2개월, 치료에 들어가도 1년 정도 밖에 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올 1월 초에 입원을 했다. 그날 자정 무렵, 간호사가 항암제라며 약을 가지고 왔다.

“두려웠어요. 독약을 먹이는 느낌이랄까요. 딸의 두 손을 잡고 기도했더니 좀 편안해 지더군요. 그런데 약을 먹은 후 곧바로 구토를 하더군요. 5번 정도 토하니까 날이 훤하게 밝아왔어요.”

그렇게 시작한 항암치료는 6차까지 계속됐다. 어른도 참기 힘든 고통을 잘 견뎠다. 그런데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5월말부터는 청력을 상실했다. 걸을 수도 없고,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기관지에 구멍을 뚫어 말도 할 수 없게 됐어도 딸은 울지 않았다.

6월부터 입·퇴원을 되풀이 하다가 폐렴과 패혈증, 수두증 등의 후유증으로 10월22일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담당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이틀 정도 지나면 아마도 뇌사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씨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20분씩 2번의 짧은 소통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씨는 간호사를 통해 A4 용지에 굵은 사인펜으로 편지를 써 보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알지. 예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이 이 어려움을 완전히 이기는 힘이 될 거야. 혜인아! 사랑하는 예수님께 네 모든 걸 맡기렴. 아주 작은 것부터 모든 것을 말이다. 예수님이 혜인이를 통해 행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탁드리렴. 신비하고도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이 너를 감싸줄 거야. 혜인아! 하루에 두 번 밖에 이렇게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엄마와 아빠는 기도실에서 예배실에서, 그리고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늘 혜인이를 생각하고 있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는 네가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다. 이 고비 역시 예수님 손잡고 이겨 낼 것을 엄마와 아빠는 확신해. 혜인이와 예수님은 예전부터 환상의 콤비니까 오늘 밤도 예수님과 행복한 데이트하길 기도한다. 사랑해, 혜인아. 그리고 네가 힘들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앞으론 절대로 너의 옆을 떠나지 않을 거야….”

엄마의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일까. 이튿날 딸은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았다. 그로부터 3주일 째 병실에서 엄마보다 먼저 눈을 뜬다. 그리고 엄마에게 눈으로 말한다.

“티 없이 맑은 눈 보셨어요. 혜인이를 통해 영적인 눈을 다시 뜨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한 뼘도 안 되는 믿음이었거든요. 제가 울면 울지 말라고 눈으로 말해요. 그럴 땐 예수님의 눈을 보는 것 같이 경이롭고 기뻐서 눈물이 나기도 해요. 그러면 우리 혜인이가 울지 말라고 눈을 깜박거려요. 참 신기하고 놀라워요.”

이씨는 딸이 투병생활을 하면서 서울 방화동 우리교회(이희만 목사)에 나간다. 이씨의 어머니가 전도사로 사역하는 교회다. 이씨의 어머니는 늦게 신학을 공부해 심방을 다니며 기도한다. 바쁜 딸을 대신해 외손녀를 갓난아기 때부터 키웠다. 이 교회는 요즘 혜인이의 투병을 계기로 전 성도들이 믿음생활을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씨는 사랑하는 딸의 아픔으로 인해 온전한 신앙을 되찾았다. 떠돌이 믿음 생활을 청산하고 혜인이 외할머니가 섬기는 교회에 둥지를 틀었다. 성공과 출세라는 길목 한 쪽에 엉거주춤하던 태도에서도 과감히 벗어나게 됐다. 가정의 행복보다 조직의 성공과 승리를 위해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회개했다. 회사는 이씨를 휴직처리로 배려했다.

“달리다굼 에바다. 달리다굼 에바다…(소녀야 일어나라. 입과 귀가 열리고 눈을 떠라).”

세브란스병원 본관 10층 1053호. 애절한 해금 가락 같은 그녀의 기도는 밤 낯을 가리지 않는다. 매일 2시간 간격으로 딸의 팔다리를 만지며 일어나 돌아갈 수 있기를 간구한다. 동이 틀 무렵이면 딸은 해맑은 눈으로 엄마의 가슴 속을 파고든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