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수놓은 가창오리 갈대꽃은 길따라 수군거리고… 군산 비단강길

입력 2010-11-10 17:18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의 ‘탁류’ 중에서)



장항선 열차가 채만식의 ‘탁류’로 유명한 금강을 건너 잠시 호흡을 고르는 곳은 내흥동의 군산역. 군산 비단강길(구불1길) 도보 여행의 출발점이기도 한 군산역사에는 특이하게도 2층에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전시한 군산내흥동유적전시관이 위치하고 있다. 장항선 개량공사로 역사를 신축하던 중 인근의 땅속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군산역을 출발한 비단강길은 아직은 개발이 안돼 시골풍경을 오롯이 간직한 내흥동 마을길을 터벅터벅 걷는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황량하다. 하지만 콩 타작을 하는 촌로와 벼 그루터기를 태우는 구수한 냄새, 그리고 하늘거리는 억새가 서정적인 가을풍경을 그린다.

농로를 빠져나온 비단강길은 고은의 ‘노래섬’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 등 국내외 시인 20여명의 시를 자연석에 새겨놓은 진포시비공원을 만난다. 비단강길은 진포시비공원에서부터 비단처럼 곱게 흐르는 금강을 벗한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금강체육공원을 지나면 백릉 채만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채만식문학관이다.

군산 옥구에서 태어난 채만식(1902∼50)은 1925년 단편 ‘새길로’로 문단에 데뷔했다. 장편소설 ‘탁류’는 초봉이라는 한 여인의 비극적 사건을 놓고 사회의 비리를 풍자한 작품. 문학관에는 채만식의 삶과 작품, 그리고 작품 속의 군산 이미지가 전시되어 있다.

채만식문학관과 이웃한 금강호시민공원의 중앙광장 옆에는 17.9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진포대첩비가 서있다. 1999년에 군산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비로 꼭대기에는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쳐부순 화포의 모형이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다. 진포대첩은 고려의 최무선이 직접 발명한 화포를 주무기로 쌀을 약탈하기 위해 금강으로 침입한 5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한 전투.

금강하구둑 남쪽에 위치한 어도(魚道)는 산란을 위해 바다로 나가는 참게, 뱀장어를 비롯해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황복, 웅어 등 회유성 어류들의 통로 역할을 한다. 금강시민공원과 금강호휴게소를 연결하는 지하보도의 교각은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공공미술 작품이다.

금강과 함께 나란히 걷던 비단강길은 금강철새조망대에서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 배달되는 ‘철새들의 편지’ 우체통을 만난다. 올 9월에 첫선을 보인 우체통에 접수된 편지는 모두 900여통.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중 아내와 자녀에게 쓴 편지 3통이 수취인 주소를 적지 않아 금강철새조망대의 철새지기를 애타게 한다고 한다.

비단강길은 철새조망전망대에서 우회전해 오성산(227m)을 오른다. 성덕마을 안쪽의 항동제를 돌아 구불구불한 임도를 힘겹게 오르면 군산의 관광명소인 오성산 정상이다. 군산기상대 레이더기지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금강과 나포십자들이 손에 잡힐 듯 정겹다.

오성산 정상에 위치한 오성인의 묘는 당나라의 소정방에게 사비성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아 죽임을 당한 다섯 노인의 무덤. 패러글라이딩 활강장을 지나 오성산을 내려가거나 물탕골을 지나서 수심마을로 내려가면 비단강길은 다시 하나가 된다. 이어 서왕마을, 내촌마을, 원서포마을을 지난 비단강길은 금강변에서 탐조회랑을 만난다.

18㎞ 길이의 비단강길은 금강 둑길을 걸어 조기파시로 유명했던 원나포마을의 ‘즐거운학교’에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비단강길을 조붓하게 걷는 즐거움은 철새탐조회랑이 위치한 약 5㎞ 길이의 금강둑에 집중되어 있다. 여느 길과 달리 금강둑은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 길인데다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과 드넓은 나포십자들을 조망할 수 있다.

나포십자들은 본래 원나포에서 서포까지 갈대가 무성했던 강기슭이다. 1920년대 간척사업을 통해 총 530㏊가 농경지로 바뀐 곳이다. 나포십자들 인근은 강폭이 넓고 사람들의 접근이 드문 곳이라 경계심이 강한 철새들이 생활하는 곳.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가창오리 50만 마리를 비롯해 80여만 마리의 철새들이 모여들어 새들의 왕국을 건설한다.

하루 종일 수면에서 휴식을 취하던 가창오리 떼가 해가 저물자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수만 개의 점이 모이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만들어내는 가창오리 군무는 살아있는 생명체.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른 가창오리 떼가 롤러코스터처럼 온갖 묘기를 선보인다.

이어 두 무리로 갈라진 가창오리 떼가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하지만 비행의 고수답게 충돌하는 일 없이 점과 점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파고들어 다시 거대한 생명체를 만든다. 이어 하늘을 빈틈없이 까맣게 물들였던 가창오리 떼가 망해산 너머 김제평야와 호남평야로 사라진다. 순간 비단강길의 갈대꽃이 비로소 가창오리 군무가 주는 감동과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떤다.

군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