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10) 진해 훈련소까지 18일간 목숨 건 행군
입력 2010-11-10 17:02
평양 집을 떠난 지 20일째 되던 1950년 12월 23일, 다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8일간의 죽음과의 사투가 시작된 날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성화신학교 동창들의 제안으로 나와 승규는 군에 자원입대했다. 처음에는 “신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아 유엔군에 입대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솔깃해 간 것이었는데, 모병 장소인 국회의사당 앞에 가 보니 ‘방위군’이라는 임시 조직이었다. 방위군은 30명씩 소대를 편성해 훈련소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우리가 다 함께 배치된 소대의 훈련소는 경남 진해에 있었다.
하필 가장 추울 때 출발해 오로지 걸어서 가야 했다. 식량 배급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고 일어나면 추위 속을 걸어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성탄절 이브가 됐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마침 한 마을을 지날 때 교회를 발견하고 들어갔다. 장로 한 분이 맞아 주셨다.
“저희는 평양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입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럼 저희 성탄예배에서 순서를 하나씩 맡아 주시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탄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따뜻한 예배였다. 예배 후 성도들이 차려 준 음식이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그 교회를 다시 찾아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도무지 위치를 기억할 수 없었다.
강행군은 계속됐다. 큰 길은 정식 군대가 사용하기에 우리는 주로 험한 산길로 다녔다. 안 그래도 추위와 배고픔에 허약해진 사람들이 쓰러져 죽는 일이 속출했다. 조금 전까지 함께 걷던 동료가 죽어가는 일은 공포감도 줬지만 삶에 대한 의지도 줬다. ‘살아야겠다’고 이를 악물며 걷고 또 걸었다.
다만 소대에서 가장 어렸던 열일곱 살의 승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체력은 바닥나고 발에 물집이 생기고 부어서 도저히 걸을 수 없게 됐다. 이를 본 동창들이 승규를 번갈아 업어줬다. 자신들도 생사의 기로에 있으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 친구들의 마음은 두고두고 곱씹을수록 감동적인 것이었다.
한 번은 내가 승규를 업고 가는데 남쪽으로 가는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운전수에게 통사정을 해서 승규를 태워 보냈다. 무조건 남쪽으로만 가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행군 중에 다리를 절며 홀로 걷고 있는 승규를 만났다. 뛰어가 보니 입고 있던 외투가 없었다.
“어찌 된 일이니? 외투는 어디 있어?” 승규의 대답이 트럭을 타고 내려가다 시골 여관에 묵었는데 여관 주인이 숙박비 대신 외투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전쟁 통에 이 힘없는 자에게서 겉옷까지 빼앗는 자가 대체 사람인가!”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행군 중에 그토록 굶주렸던 것은 몇몇 장성과 지휘관들이 보급물자를 빼돌렸기 때문이었다. 훗날 처벌을 받았다지만 당시 죽어갔던 사병들을 떠올리면 죗값을 치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행군 중에 도움을 받기도 하고 부당하게 착취당했던 일들은 나에게 오래도록 많은 생각을 줬다. 특히 ‘나그네 된 자’에 대한 연민을 가지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을 떠난 지 18일 만에 진해에 도착했다. 다행히 우리와 성화신학교 동창 20명은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 ‘해병대’에 대해서 알게 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