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만화 돌파구는… 만화! 그 이상의 상상플러스
입력 2010-11-09 21:31
한국만화가 위기라고 한다. IMF 직후 직장에서 내몰린 넥타이 부대원들과 취직 못한 청춘들이 바글거리던 동네 만화방과 만화대여점이 자취를 감췄다. 만화방과 대여점이 이러니 1주일이면 몇 권씩 그려내던 만화가들도 사라졌다. 인터넷에서는 단행본 한 권 값이면 클릭 몇 번만으로 1000권이 넘는 ‘스캔 만화’(만화책을 스캔해 인터넷에 올린 불법 파일)를 다운로드할 수 있다. 한국만화는 이대로 죽는 건가.
◇한국만화, 돌파구를 찾아라!=지난 8일 오전 10시 서울 한강로3가 대원씨아이㈜ 편집실. 권영민(42) 영챔프 편집장은 아이패드를 이리저리 꾹꾹 눌러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패드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그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흡∼’하고 심호흡을 했다. 권 편집장은 요즘 아이패드에 빠져 있다.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게 세계적인 히트를 친 놈 아닙니까. 신세대가 열광한다는데, 우리도 이걸로 활로를 찾아야죠.”
그는 빠르면 2년 안에 아이패드가 우리나라에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보고 그 전까지 아이패드용 만화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이다. 개발까지 완료하려면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일지 결정되지 않았지만 내년쯤에는 어떤 식으로든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만화를 보여주다 클릭하면 만화 캐릭터가 움직이는 겁니다. 근사하지 않습니까? 사람 눈동자를 따라 만화책이 이동하는 건 어떨까요?”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서초1동 ㈜시공사 만화팀 백소용(37) 팀장과 김은주(32) 대리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만화 관련 블로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시공사 만화팀은 그동안 일본만화를 국내에 소개하는데 주력했다. 탄탄한 서사와 충격적이고 세련된 그림을 장점으로 한 일본만화는 한 때 한국 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소재 고갈과 대작 부재가 이어지면서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 만화팀이 찾은 돌파구는 ‘마니아’였다.
“만화책을 휘리릭 넘기며 읽는 뜨내기 독자들은 어차피 스캔 만화를 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수집하고, 만화 캐릭터를 따라하거나(코스튬플레이), 만화를 따라 그리는(팬아트) 진짜 독자를 공략키로 했죠.”(백 팀장)
만화팀은 미국의 마블(Marvel)이나 디시(DC) 같은 출판사들이 개척해온 ‘그래픽 노블’을 선택했다. 그래픽 노블이란 만화와 소설의 특성이 결합된 장르로 재미를 추구하던 만화의 영역을 정치, 사회, 철학 등으로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70년대 이후 슈퍼맨과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의 코믹스 작품들이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했다.
그래픽 노블 제작에는 마니아를 참여시키는 ‘실험’을 했다. 인터넷에서 ‘부머의 슈퍼히어로’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던 이규원(33)씨와 함께 ‘슈퍼맨: 땅위에 평화를’ ‘엑스맨, 메시아 콤플렉스’ 등 10권을 출간했다. 이씨에게 번역을 맡겼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수익성이 높았고, 무엇보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마니아를 알아주는 출판사’라는 평가를 얻은 게 소득이었다. 대원씨아이도 성인 마니아를 겨냥해 바둑이나 낚시, 여행, 음식기행 등을 다룬 만화로 짭짤한 이익을 내고 있다. 권 편집장은 “옛날에 잡지를 보던 독자들이 돈을 버니 책을 사는 모양”이라며 “아동이라는 덩어리로 뭉쳐있던 독자층이 이젠 성인으로 확산되고 관심 분야도 쪼개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스캔 만화보다 무서운 엄숙주의=만화 출판업계자들은 인터넷을 나쁘게만 바라보지 않았다. 인터넷은 불법 파일 유통으로 업계 추산 2000억원대의 피해를 입힌 ‘원흉’인 동시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이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게 스캔 만화라면, 스캔 만화 보다 무서운 건 우리 사회의 엄숙주의다. ‘19금 딱지’를 붙여 책을 내는데도 유독 만화만 손가락질을 받는 현실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꺾는다. 만화를 하찮게 여기는 풍조도 만화 발전을 가로막는다. 권 편집장은 “만화가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어김없이 ‘누가 하면 예술이고 누가 하면 외설인가’라며 하소연이 터져 나온다”며 “지금도 우리 부모님들은 공부 안하고 만화 본다고 아이들을 나무라는데, 만화를 우습게 아는 사회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만화의 발전가능성은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