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병자호란·흉년 대혼란 겪던 조선 빈민감세 등 조세개혁으로 위기 극복”

입력 2010-11-08 14:18


‘대동법’ 본격 연구서 첫 출간 이정철 박사

감세든 증세든, 세금은 항상 논란거리다. 요즈음에도 뉴스에서는 소득세니 ‘부자감세’니 하는 용어가 자주 들린다. 조선 후기에도 마찬가지여서 위정자들은 새로운 조세제도의 시행을 놓고 국운을 건 승부를 벌였다. 대동법이 그것이다. 대동법의 내용과 100년에 걸친 시행 과정을 다룬 책이 출간됐다. 대동법에 관한 최초의 본격 연구서라할 만한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역사비평사)을 펴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의 이정철(45) 박사를 6일 서울 안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위기의 조선후기를 지켜낸 대동법=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흉년으로 인한 대기근을 겪은 조선의 17세기는 전례없는 위기와 고난의 시기였다. 동아시아 전체로 보아도, 이 때는 중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왕조교체 및 정권교체가 이뤄진 격변기였다. 특히 조선은 국토가 유린된 전쟁에서의 패배, 인구와 농경지의 격감 등으로 정세가 불안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왕조 교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들어 영·정조의 안정적 통치가 이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박사는 그 원인을 대동법을 통한 조세개혁의 성공에서 찾았다. 상공업 발달의 측면에서 대동법에 주목한 학계의 연구 성과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임진왜란 뒤 조선이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시대의 모순을 해결했어야 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전체주의적 발상이 될 수도 있어요.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제도를 고쳐 더 나은 사회가 되기를 바랐지요.”

그러나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이다. 대동법 실시는 기득권층의 이익 감소, 빈민·서민들의 혜택으로 이어졌다. 송의 왕안석, 명의 장거정, 조선의 갑신정변…. 역사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실패로 끝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왕조의 중간쯤에서 이런 종류의 개혁이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대동법이라는 조세개혁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어요.”

◇개혁의 핵심은 ‘빈민감세’=대동법의 성공은 가난한 자들이 내는 세금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면서도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잃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 조선의 세금 체계는 ‘조(토지세)·용(군역·요역 등의 노동력 제공)·조(토산품 진상)’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국가 재정의 근간이 되는 토지세 제도는 세종시대에 이미 정비돼 있었다. 이에 반해서 ‘공물’이라고 불리던 토산품 납부는 공정하고 정밀한 수취 체제를 갖지 못했다. 토지세 제도 정비 이후에 문제와 폐단은 자연히 공물 수취 쪽에서 일어났다.

고을 수령과 방납인(백성들로부터 쌀이나 콩 등을 받고 공물을 대신 내주는 사람들)이 개입할 여지가 컸던 것이다. 공물 대신 현물(쌀)을 납부하게 하고 국가가 직접 이를 받음으로써 폐단을 바로 잡은 것이 대동법이다. 이 박사에 따르면 이 제도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80%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국가가 처음에 1년 예산으로 100을 설정했다고 칩시다. 국가예산은 조금씩 커지기 때문에 실제 쓰는 돈이 나중에는 200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중간 과정의 수탈 때문에 백성들이 내는 돈은 2000이나 되는 거예요. 대동법은 국가 예산을 200으로 인정하고, 백성들에게 200을 거둬들이도록 한 거예요.”

그 때문에 ‘대동법은 증세다’, ‘수령이 진상하는 물품을 세금으로 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명분을 내세운 반대론도 거셌다. 하지만 광해군부터 현종에 이르기까지의 60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대동법은 점차 확대됐고, 18세기 조선은 재기에 성공했다. 이 박사는 “대동법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종말은 100년은 일찍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동법은 19세기 환곡제도의 문란이 문제가 될 때까지 조선사회의 안정을 뒷받침하는 제도였다. “이런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조선에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도 개혁을 국왕이 아닌 신료들이 주도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원익 김육 조익 등 당대의 재상들이 주도하고 수많은 실무진이 뒷받침했는데 대동법 지지자들 중엔 청백리가 많아요. 당시 조선과 같은 생명력을 현재의 우리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 또한 생각해볼 만 합니다.” 시대적 위기를 제 것으로 여기고, 공공의 이익을 사욕보다 우선한 사대부가 많았기 때문에 대동법이 성공할 수 있었는 얘기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