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76)

입력 2010-11-08 10:06

나는 '젖은 나무' 같은 목사입니다

젖은 나무는 늦게 불이 붙지만/ 오래오래 끝까지 타서/ 귀한 숯을 남겨 준다고 했지/ 젖은 나무는 센 불길로 태워야 하듯/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끈질기게 타올라야 한다고 했지/ 나는 젖은 나무/ 눈물 젖은 나무니까 -박노해 ‘나는 젖은 나무’의 일부-

깨달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生而知之/ 나면서부터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學而知之/ 좋은 학교와 스승을 만나 쉽게 깨친 사람과, 困而知之/ 갖은 고생을 겪으며 힘들게 깨달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몇 년 전, 노동자 시인이며 사회혁명가인 박노해 형(그와 나는 한 살 차이다)과 나는 얼마의 시간을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같이 지냈다'고 해 봐야, 주로 형이 내가 사역하는 교회를 방문하거나, 내 삶에 얽힌 인연 때문에 만나는 정도였습니다. 형의 삶과 부합하는 일에 내가 참여했다거나 동역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함께 먹고 마시고 자기도 하면서 나는 형의 됨됨이에 여러 번 놀라곤 했습니다. 형은 일정부분 ‘깨달은 존재’였는데, ‘갖은 고생을 하면서 힘들게 깨달은’ 경우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런 가느다란 인연 때문에 나는 각별히 형을 좋아하고 흠모합니다. 70년대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 지닌 감정과는 다른 흠모가 내게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박노해의 시’ 여러 편을 외우고 있습니다. 가끔 여러 사람 앞에 나서서 뭔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외우고 있던 시 중에서 적절한 시 한 편을 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곤 합니다.

엊그제, 신학대학원 학생들에게 ‘목회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두어 시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내가 외워 들려준 시가 바로 ‘나는 젖은 나무’라는 시였습니다. 목사인 내게 이만큼 절절하게 나를 직시해주는 시는 여태 만나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안간힘을 써도

잘 타오르지 않고 연기만 나는

나는 젖은 나무]같은 목사입니다.

<춘천 성암감리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