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7) 1949년, 공산 정권 하에서 성탄축하음악회
입력 2010-11-07 17:37
1946년 5월 반공 학생 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후 몇 달간 집에서 지내면서 나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울분을 어쩌지 못해 자주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겨야 했다. 정의로운 일을 했는데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 손을 잡고 편입학할 수 있는 학교를 알아보러 다니셨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가까스로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승낙을 받았는데 조건이 있었다. 학생 데모에 일절 참가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라는 것이었다. 호기롭게 거절하고도 싶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이는 곧 더 큰 불행으로 돌아왔다. 그 학교에서 나를 사상이 불순한 학생으로 분류하는 바람에 졸업을 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할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이대로 학업을 중단해야 한단 말인가!” 불과 열일곱 살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말았다는 좌절감이 엄습했다.
유일한 출구는 지금의 교회 중·고등부인 ‘소년소녀면려회’ 활동이었다. 내가 다녔던 서문밖교회를 비롯해 평양시 교회들의 소년소녀면려회가 모여 연합회를 구성했는데 여기서 총무로 선출돼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이 연합회에는 특히 퇴학생들이 많았다. 공산당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거세지고 있어서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 쫓겨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연합회 모임에서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부르짖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형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학교’라는 말만 듣고도 귀가 번쩍 뜨여 따라간 곳은 성화신학교였다.
“이런 시국에 신학교가 수업을 하고 있다니!” 하며 신기해하는 나에게 학교는 선선히 입학 허가를 내 줬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47년 봄 신학생이 됐다.
목사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한 번도 목회자의 길을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였다. 아버지의 사역으로 인해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이 늘 안타까웠기 때문인지 “열심히 공부해서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께 효도하자”는 것이 유일한 인생 목표였다. 은연중에는 내 불뚝불뚝한 성품이 목회자와는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발걸음은 결국 신학교로 항했다. 하나님이 다른 길은 모두 막아놓고 이 학교로 나를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 뜻대로 나는 이 학교에 다닌 것을 계기로 인생 방향을 완전히 틀게 됐다.
평양 수옥리 정의학교의 담 밑에 위치한 성화신학교 교사는 아주 작고 초라했다. 건물은 교실로 쓰는 두 동과 예배실이 다였고 운동장도 비좁았다. 600여명의 학생들은 3부제로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배움의 열기는 대단했다.
예과 1학년으로 입학한 나는 학교의 신앙적 분위기에 금세 젖어들었다. 진리, 성령, 평화, 환희, 봉사 등 이전에는 잘 몰랐던 복음의 가치들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본과 1학년이었던 1949년 말 학교는 성탄축하음악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나도 참여한 합창단은 몇 달간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연습했다. 당시 인근에 ‘메시아’ 전곡 악보를 가진 이가 없어 지휘자 이재면 목사님이 수소문 끝에 함흥까지 가서 구해 오기도 했다. 12월 16일 남산현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2000여명의 청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할렐루야’를 합창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복음은 이미 공산 정권을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환희가 가득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음악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지 한 달이 채 못 돼 학교는 강제 폐교를 당하고 말았다.
정리=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