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어둠 그리고 빛

입력 2010-11-07 18:58


J양. 오랜만에 안부 전해요. 요즘도 연주여행 다니면서 감동을 주고 있겠지요? 선천성 시각장애우이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건반 위에서 감정표현을 잘하는지 경이로웠지요. 또한 밝고 거침없는 성격이 인상적이었어요. 내게 무슨 향수를 쓰냐고 물었고, 긴 드레스 연주복을 입고도 스타킹 올이 나간 것 같다며 갈색 스타킹을 하나 사다 달라고 말했던 멋지고 싱그러운 20대 아가씨였지요.

최근 지인의 권유로 블라인드 레스토랑이라는 곳에서 완벽한 어둠을 경험해 보았어요. 그곳에서 더듬어가며 식사하다가 J양의 낭랑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순간 내 귀에 쟁쟁하게 다시 들렸던 것은 왜일까요?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 다시 하기로 하고 먼저 블라인드 레스토랑 경험담을 말하고 싶네요.

음식이란 혀의 미각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시각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불을 끄고 깜깜한 상태에서 식사한다는 사실을 그저 색다른 경험 정도로 기대했었지요. 그런데 빛 한 줄기 없는 암흑세계 속에 빠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주의 미아가 되어 부유하는 듯 공간 감각과 시간 감각이 없어지고 토할 것 같은 멀미가 났어요. 심지어 자신의 실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두려움에 내 몸을 내가 만져보기도 하였어요.

평소에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라 표현할지라도 전자제품에서 나오는 빛이라든가 갖가지 빛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신기함을 넘어 공포심이 들기도 하였어요. 돌아가신 할머니가 늘 말씀하시길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어떡하든 견뎌보겠지만 눈이 안 보인다면 정말 힘들 것이라던 기억과 함께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J양이 갑자기 한 줄기 빛처럼 떠오르면서 그대에게 준 상처가 새롭게 내 가슴 속에서 감지되었어요.

오감 가운데 시각을 빼앗기고 음식의 냄새를 맡으며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씹히는 촉각만으로 요리를 음미하다가 불현듯 J양의 전화를 의례적인 말투로 받았던 과거의 한 순간이 섬광처럼 내 의식 속에 끼어들었어요. 이기심의 발로인 경계심으로 무장한 목소리로 응답하였던 일이 마음속 깊은 우물에서 퍼올려지는데 울컥 목울대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대는 분명 시각 대신 발달한 그 명민한 청각으로 내 위선을 감지하고도 남았을 거예요.

미안해요 J양.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네줬으면서도 수화기를 통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간에 인색한 마음이 앞섰던 것 같아요. 그대는 내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지요. 그때 왜 좀 더 반갑고 따뜻하게 통화하지 못 하였던가 반성과 후회가 되네요. 내 사과를 받아 주세요.

빛은 어둠의 속도를 따르지 못한다고 해요. 식당을 나오니 길가 가로등불이 낯설게 느껴졌어요. 이 빛으로 내 형상을 가질 수 있고 볼 수 있음이 감사로 다가왔어요. 빛과 어둠은 분리되어 있는 별개가 아니라 통섭의 학문처럼 하나가 아닐까요? 어둠은 밝음에서 생긴다고 채근담에 쓰여 있나요? J양. 그대가 가진 환한 빛으로 나를 다시 불러주오.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