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41) 216년 만에 해체·복원되는 수원 팔달문

입력 2010-11-07 17:23


서울에 숭례문(국보 1호)이 있다면 경기도 수원에는 팔달문(보물 402호)이 있습니다. 높이 9m, 너비 25m인 팔달문(八達門)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짓기 시작해 2년 만에 완성한 화성(華城)의 남쪽문으로 이름은 서쪽에 있는 팔달산에서 따왔답니다. 화성은 중국성의 모습을 본뜨기는 했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쌓은 대표적인 성곽이지요.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했다는군요. 성안의 부속시설은 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행궁의 낙남헌만 남아있는 실정입니다. 정조 ‘개혁의 꿈’이 어린 화성은 다른 성곽과 달리 창룡문(동) 화서문(서) 팔달문(남) 장안문(북) 등 4대문을 비롯한 건축물들이 돌과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의 자랑거리는 한 두가지가 아니지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르기도 했던 봉수당, 두 번이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서장대,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화홍문,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하는 시설물 공심돈,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등등.

사통팔달의 교통 중심지인 팔달문의 문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형태)으로 올려졌습니다.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성을 쌓았죠.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랍니다.

팔달문 성곽 축조 당시 첨단기술이 동원되고 방어에 용이하도록 옹성 형태로 건축한 이유는 병자호란의 비운에서 비롯된 것이랍니다.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란했지만 결사항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결국 임금이 머리를 땅에 찧으며 청나라에 항복한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옹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한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팔달문이 완공된 지 216년 만에 해체·복원 작업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2층 문루 들보가 처지고 기둥이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견됐다는군요. 처마를 받치며 그 무게를 기둥과 벽으로 전달시켜주는 공포도 앞쪽으로 쏠려 원형 보존이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2011년 12월 완공될 예정인 복원작업은 문루의 기와 지붕을 해체한 다음 서까래 등 목조의 변형상태를 확인해 이상이 생긴 부분을 교체하는 식으로 진행된답니다. 1920년대 팔달문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적은 있었지만 지붕까지 해체하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에 이어 팔달문도 당분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완공 기일에 쫓겨 졸속공사가 돼서는 안될 겁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