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이화여대 명예교수) 박사가 밝힌 '한국 교회 88선언 뒷얘기'
입력 2010-11-07 09:39
[미션라이프] 서광선(이화여대 명예교수) 박사가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선언’(88선언)과 관련한 비화를 공개했다. 서 박사는 6일 오후 새문안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주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문서의 분류와 DB화’ 주제 학술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을 했다.
88선언의 대표집필자인 서 박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한 기초위원의 증언과 고백’ 주제의 강연에서 1970년대 한국 교회가 인권·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과 관련 “박정희 정권의 잇따른 긴급조치 발표와 민청학련 사건으로 많은 기독 청년들이 구속되거나 수배됐다”며 “이 같은 인권 말살의 시대에 책임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역할을 고민하다가 시민단체와 합해 인권·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당시 일반 지식인 계층은 선(先)통일 후(後)민주를 주창했지만 NCCK 계열 기독교 지도자들은 오랜 토론 끝에 선민주 후통일로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박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서울에도 봄이 왔다고 기뻐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광주와 서울엔 오히려 겨울이 찾아왔다”며 “그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결국 광주항쟁과 신군부 억압의 원인이 모두 분단체제에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분단체제 극복에 나서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신군부의 등장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통일운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지만 이 때문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등 기독자교수회 소속 30여명이 합동수사본부에서 사직서를 쓰고 학교에서 쫓겨나 해외 등지를 다니며 통일을 연구했다”고 털어놨다. 이만열 박사의 경우는 82년 미국 프린스턴대로 가서 통일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는 것.
그러면서 서 박사는 “당시 NCCK 선교교육원 원장이었던 오재식 박사가 ‘한국 기독교의 통일논의를 통해 통일문서를 만들자’고 해서 NCCK 통일위원회 결의를 통해 9인 위원회를 조직했다”고 밝혔다. 서 박사에 따르면 9인 위원은 오 박사와 서 박사를 비롯해 강문규 이삼열 노정선 김용복 홍근수 김창락 민영진 등이다.
그는 “9인 위원들이 모일 때마다 청와대와 보안사, 정보부 직원들이 방해를 해 어려움이 많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서 박사에 따르면 9인 위원회는 세 파트로 나눠 통일문서의 신학적 기반, 남북한 정부를 향한 건의, 한국 교회를 향한 호소 내용을 연구하고 집필했다. 그는 “9명은 늘 정보부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전전하며 모여야 했다”며 “목숨을 걸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학 부문에서는 남북 분단이 원죄임을 언급했고, 남북한 정부 건의사항에는 7·4 공동성명의 3가지 원칙, 즉 평화적 방법, 주체적 민족자주, 이념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다가 인도주의와 민중참여의 원칙 두 가지를 덧붙였다”고 말했다. ‘민중참여’와 관련 서 박사는 “그때는 통일논의를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은 통일문제를 논의만 해도 잡혀가는 정부와 권력 독점의 통일논의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목사와 학자들이 서로 의견이 달라 모이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고 싸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웠던 게 이삼열 박사가 주도했던 신학부문”이라며 “9명의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언서 초안을 승인한 것은 기적이다.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NCCK 총회에서 선언서를 결의하면서 김형태 목사가 너무 감격스러워 울면서 통곡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NCCK 총회에서 ‘다 좋은데 왜 통일된 나라의 모습이 안들어갔느냐’ ‘통일로 가는 길만 얘기했지 목적지가 없으니까 맥 빠진 문서다’라는 신랄한 비판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며 “연방제의 ‘연’자만 꺼내도 보안법에 걸리는 상황에서 그걸 논의했다면 아마 88선언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 박사는 또 “당시 이홍구 통일원장관의 요청으로 통일원 국장 10여명을 모아놓고 88선언을 해설하기도 했다”며 “정부가 우리 같은 사람을 고문하는 게 아니라 우리 얘길 듣겠다는 자세 때문에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남북 총리회담이 열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왔다. 88선언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비교 연구를 해보니 남북기본합의서의 80% 이상이 88선언을 정책적으로 표절한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88선언은 냉전시대에 통일의 물꼬를 텄을 뿐만 아니라 이후 통일을 지향하는 10년 정권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8·15 해방부터 계산해서 49년이 지난 50년째엔 제2의 해방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1995년을 한국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했지만 95년이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희년은 아직도 우리 머릿속에만 있다”며 “평화와 통일, 화해 협력이 점점 더 멀어져가는 현실을 보며 다시 한번 문서가 나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 박사는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는 88선언이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정말 상부구조만의 88선언이지 교인들에겐 88선언이나 희년운동, 평화운동은 전혀 이해가 안되고 있어 안타깝다”며 “88선언을 우리만, 역사적 자료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88선언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심포지엄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 한승헌 변호사 등 50여명의 학계와 교계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글.사진=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