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관 성장의 역사… 1910년 기도원 운동이 뿌리 70년대 전·후로 급격히 확산
입력 2010-11-05 17:37
교회 수양관 설립은 기도원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영성훈련을 통한 영육의 재충전에 목적을 둔 수양관은 기도원 운동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도를 통한 성령 체험을 강조한 기도원 운동은 1970년대까지 성령운동의 젖줄 역할을 했으며, 성도들을 영육 간에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대 강화도 마니산에서 시작된 기도원 운동은 평양 부흥운동 등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확대됐고 조선장로교총회가 전국 교회의 모금운동을 전개해 1931년 금강산수양관을 건축하면서 외형적 결실을 맺는다.
일제 하에선 탄압에 따른 신앙의 내재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신비주의 현상과 함께 기도원 운동이 일탈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은밀한 기도처들은 해방 후 기도원 운동을 이끌며 북한 금강산 기도처와 산성 기도처, 정주 오고동 약수터 기도처, 서울 삼각산 기도처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40년 강원도 철원에서 시작된 대한수도원과 경북 추풍령 부근에서 시작된 용문산기도원은 기도원 운동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 불안 속에서 기도원과 연결된 신흥 종교집단이 우후죽순 생겨나기도 했다.
69년 설립된 한얼산기도원과 73년 세워진 오산리금식기도원은 본격적인 기도원 운동의 새 장을 열게 했다. 특히 오산리금식기도원은 치유와 성령은사, 금식이라는 신앙양식을 한국교회 안에 제공했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와 함께 오순절 성령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74년 전국에 129개에 달하던 기도원은 89년 362개로 늘어났으며, 2001년 552개로 늘었다. 이렇게 생겨난 기도원은 초교파적으로 운영되는 기도원과 교단 직영 기도원, 개 교회 설립 기도원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70·80년대 신학 부재와 상업주의적 운영, 잘못된 은사관 등 이단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그 운동은 한풀 꺾이게 된다. 90년대부턴 인력과 재정이 풍부한 중·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자체 수양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백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