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름다워질 때까지 서울의 예수는 울고 있겠지요”

입력 2010-11-05 17:20


회갑 맞은 ‘문학청년’… 정호승 시인 열번째 시집 출간

시인 정호승. 그는 암울했던 1970∼80년대를 거쳐 오는 동안 소외받는 계층의 아픔과 상처를 껴안은 시편들을 통해 대학가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 중에서도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로 시작되는 시 ‘서울의 예수’는 성경 속 예수를 시대의 고통을 낚시하는 예수, 찬 밥 한 그릇 얻어먹는 예수로 형상화하는 파격적인 발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암송되곤 했다. 특히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라는 구절은 지금도 절창으로 꼽힌다.

정호승 시인이 회갑을 맞았다. 하지만 최근 출간된 그의 열 번째 시집 ‘밥값’(창비)에는 ‘회갑’ 혹은 ‘회갑 기념’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회갑 때면 으레 기념 문집이나 시선집을 묶어내는 문단 풍토와는 달리 그는 나이 듦에 대해 너스레를 떨지 않는다. 여전한 문청(文靑)인 것이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시력 38년에 이른 그를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만났다. 머리만 다소 희끗희끗할 뿐, 얼굴은 잔주름 하나 없는 동안(童顔)이다.

“‘서울의 예수’는 1979년 말에 썼지요. 당시는 현대사의 질곡이 깊었지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과 같은 시대적 배경이 그 시에는 보이지 않게 숨어있지요. 시를 발표한 건 80년 7월,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서죠. 말하자만 폐간호에 실린 셈인데 당시엔 내가 여의도의 한 잡지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한강에서 낚시하는 예수’라는 시상을 떠올릴 수 있었지요.”

‘서울의 예수’는 지금도 기독교적 시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시에 예수를 불러들인 이유가 궁금했다. “어린 시절에 유년주일학교에 다녔지요. 크리스천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새벽 기도도 다녔는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성탄 이브 때 새벽송(頌)을 돌던 기억이 납니다. 손전등이 없던 시절이어서 깡통에 촛불을 끼워 불을 밝히고 눈 내린 길을 걸어 어느 집 대문 앞에서 성가를 불렀지요. 아마 내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일 겁니다. 너무 어려서 성경의 어느 한 구절도 깊게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성탄 이브의 추억만으로도 예수의 존재를 가슴 깊게 느낄 수 있었지요.” ‘서울의 예수’가 씌여진 지 30여년. 그 세월동안 우리의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닐 것이다.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건 사랑이 부족해서죠. 사회가 자꾸 서로를 비교시키고 경쟁시키니까 행복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미지는 30년 세월을 훌쩍 넘겨 펴낸 이번 시집에도 군데군데 등장한다. “피자를 배달하러 온 청년 뒤에/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중략)/그런 날은 식탁에 앉아 예수와 피자를 나눠먹으며/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던/장기려 박사의 사랑 이야기를 할 때도 있다”(‘최후의 만찬’ 일부)

그에게 예수란 어떤 존재일까. “예수는 또 한 사람의 시인이며 모든 사람을 모두 시인이게 한 시인입니다. 언젠가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건 마더 테레사가 남긴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본다’라는 말을 패러디한 것이죠.” 그의 시는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이 드물다. 예컨대 밤하늘의 달이 한 편의 시이듯, 사람은 저마다 한 편의 시인 것이다.

이번 시집엔 유난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어머니/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아무리 멀어도/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밥값’ 일부)가 그렇고 “늙은 아버지의 몸을 씻겨드리는 일은/내 시체를 씻기는 일이다/하루 종일 밖에 나가 울고 돌아와/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가서/정성껏 씻겨드리는 일은/내 시체의 눈물을 씻기는 일이다”(‘풀잎에게’ 일부)가 그렇다.

그의 일상이 들여다보이는 시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실제로 연로한 부모님을 보기 위해 매일 출퇴근하는 아들인 것이다. “부모님은 제가 사는 도곡동 집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사십니다. 아버지는 90세, 어머니는 87세지요. 어느 날 갑자기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열심히 찾아가 뵙자, 라는 마음에서 집필실을 아예 부모님 집으로 옮겼지요. 방 하나를 빌려서 말이죠. 매일 아침마다 부모님 집으로 출근한 게 벌써 7년째입니다.”

언젠가 세상을 뜰 어머니를 대신해 먼저 저 세상에 출근하듯 다녀오겠다는 시인 정호승. 그에게 죽음이란 삶의 다른 이름으로 우리 곁에 늘 자리하면서 우리에게 더욱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하는 거울이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그는 지금에 감사하며 자신의 길을 가다듬는다. 그 성찰의 방법은 지난 세월에 대한 반성의 자세인 것인데 그는 근원적인 비애를 야기하는 현실의 남루함, 그로 인해 하루하루 세속에 찌들어가는 보통사람들의 죄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다.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길을 떠날 때마다/다른 사람의 짐은 멀리 던져버려도/어느새 다른 사람의 짐이/내가 짊어지고 가는 짐의 절반 이상이다/풀잎이 이슬을 무거워하지 않는 것처럼/나도 내 짐이 아침이슬이길 간절히 바랐으나/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짐’ 일부)

자신 또한 현실 속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겸허한 자각을 내보이는 시인은 그리하여 이러한 반성을 토대로 서로가 양보하고 희생하며 한데 어우러져 사는 삶을 소망한다. 그게 그가 말하는 ‘밥값 하는 세상’인 것이다. “언어로서 감동 받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시대지요. 지금은 영상정보화 시대가 아닙니까. 하지만 언어 속에도 영상이 있긴 한데 그 영상을 발견할 수 있는 영혼이 점점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고(思考)하지 않고 영상만 보는 시대를 거슬러 시와 소설은 자기 사고를 통해서 영상을 보는 행위 입니다. 저는 이제야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지요.”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