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정태] 대포폰 소총폰 권총폰
입력 2010-11-04 17:45
대포차, 대포통장, 대포폰의 공통점은? 명의등록자와 사용자가 다르다는 점이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타인 이름으로 거짓 등록해 사용한다. 주로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노숙인이나 신용불량자 등의 명의로 개설된다.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다.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포’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대포(大砲)의 사전적 의미 중 하나인 허풍이나 거짓말을 빗댄 말에서 나왔다는 얘기가 일반적이다. 영어 ‘데포(depot·창고 또는 차고)’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미국 등에선 중고차 판매회사를 ‘car depot’라고 부르는데 데포를 우리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대포가 됐다는 것이다. 막무가내라는 뜻의 일본말 ‘무데뽀(無鐵砲)’가 어원이란 주장도 있다.
대포차, 대포통장에 이어 2000년대 들어 휴대전화가 대중화되면서 대포폰이란 신조어가 생겼다. 2003년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수록됐다. 대포폰은 요즘 보이스피싱 등의 범죄 필수품이다.
그런 대포폰이 권부의 핵심인 청와대에서 만들어졌다. 청와대 행정관이 민간인을 불법 사찰한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에게 대포폰을 제공한 것이다. 이 대포폰은 지원관실 직원이 사찰 증거인 하드디스크를 파기하기 위해 컴퓨터 전문 업체와 통화하는 데 사용됐다. 청와대와 총리실이 범죄 집단에서나 쓸 만한 대포폰을 사용한 건 통화내역 추적이나 도·감청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왜 청와대와 총리실만 대포폰을 쓰는가, 국민에게도 최소한 ‘소총폰’이나 ‘권총폰’을 달라, 왜 자기들만 도청 안 당하느냐”라고 비꼬는 말이 야당에서 나올 정도다.
검찰은 그간 쉬쉬해 온 대포폰 존재 사실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공개된 뒤 난타당하고 있다. 부실수사, 직무유기, 축소·은폐 의혹…. 자업자득이다. 그럼에도 검찰은 청와대를 감싸 안기 바쁘다. 대포폰이 아니라 단순히 남의 이름을 빌린 차명(借名)폰이라고 검찰은 ‘친절히’ 설명한다.
공정 사회가 화두인데 이 사건은 의혹투성이다. 특히 국가기관의 대포폰 사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민주당 전현희 대변인은 4일 “청와대 대포폰은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능가하는 메가톤급 스캔들”이라고 규정했다. 야당에 이어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마저 검찰 재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근데 수사 의지가 없는 검찰이 재수사해본들 뭐가 나올까. 특별검사를 임명해 온갖 의혹을 규명하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길이 아닐까.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