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家 여인네 이야기, 한번 들어보시겠소

입력 2010-11-04 18:02


13대 300년 이어온 규방 기록

봄이면 자주색 영산홍 꽃봉오리가 여기저기 터져 나와 나를 감싸 안았소. 꽃이 져도 늘 푸른 대나무 숲이 그 자리를 지켜 주어 적적하지 않았소. 지금은 바람이 차가워 매자나무도 매화나무도 푸른 잎을 땅에 내려놓았소. 이제는 굳게 문이 닫혀 둘러보는 이도, 앉았다 가는 이도 없어 나는 조용히 숨을 쉴 뿐. 내 이야기 들어줄 인적 끊긴 지 일년이 넘었다오.

많은 생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마감했소. 한밭(대전) 계족산 아래 이 고택(古宅)에서 말이오. 영산홍이 봄볕에 봉오리 터뜨리듯, 구름이 무거워 비를 밀어내듯 세상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 파괴되지만, 내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덜어지지 않아 무겁기만 하오. 탄생과 죽음, 영광과 상처, 지조와 절규… 삼백 해가 지나도록 이 흙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낡은 기와집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소?

김호연재, 당당한 그러나 신산한

그러니까, 조선의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나의 첫 주인이었소. 내게서 살다간 그 많은 송씨들을 지금은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을 테니, 이 집안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겠소. 이름조차 제대로 불려지지 않았으니. 나는 그 여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소. 아비와 남편들이 과거시험과 관직을 좇아 잠시 사랑채에 머물다 가는 동안, 여인들은 여기서 뿌리를 내렸소.

송병하의 며느리는 잊혀지지 않는다오. 그녀는 열아홉 늦은 나이에 혼인해 마흔둘에 눈을 감았소. 그림 속 많은 사람 중 유독 한 사람만 내 눈앞에 서 있을 때가 있지 않소. 그녀는 지독하게 외로웠지만 늘 강한 낯빛을 보여줬소. 이름은 김호연재(金浩然齋·1681∼1722).

그녀는 남편 송요화와 인생의 많은 시간을 떨어져 지냈소. 남편은 형님이 현감으로 있던 충북 제천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어머니를 그곳에 모셨지. 홀로 남겨진 그녀는 서른이 넘는 노비를 거느리며 큰살림을 했지만 늘 가난했소. 여인 혼자 생계를 잇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 아니겠소. 가끔 시아주버니에게 또는 군수인 친척과 친정 오빠에게 곡식을 빌리면서 애써 웃던 모습이 떠오르오.

“호연당 위의 호연한 기상/ 구름과 물, 사립문 호연함을 즐기네/ 호연이 비록 즐거우나 곡식에서 나오는 법/ 삼산군수에게 쌀 빌리니 이 또한 호연한 일일세”

호연재가 군수에게 쌀을 빌리며 지은 한시 ‘걸미삼산수(乞米三山守)’라오. 다른 이들은 그녀의 의연함이 높다고들 했지. 그러나 난 그녀의 자존심과 자의식이, 강함이 더 애처로웠소. 굳게 다문 입술이 절박한 순간마다 떨리곤 하는 걸 나는 대청마루와 사립문에서, 장독대에서 보았소.

어쩌면 호연재는 송요화가 품기에 큰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드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였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오. 마음에 품은 높은 뜻은 군자(君子)가 되는 것이었소. 때로 혼인생활의 부조리함을 역설하기도 했지.

“부부의 은혜가 막중하지만 지아비가 이미 나를 저버렸으니, 나 또한 어찌 구구한 사정(私情)을 보전하여 옆 사람들의 비웃음과 남편의 경멸을 스스로 취하겠는가.”

“붕우(朋友)는 오륜의 한 가지다. 성인께서 오륜을 중히 여긴 것은 서로 더불어 선의 도를 개진하기 위함이라. 부인의 도는 좁아서 벗의 사귐이 없다. 그러나 시댁 식구들은 이름은 친(親)이나 정(情)은 없고, 은혜는 얕지만 의무는 두텁다.”(산문집 자경편·自警篇)

단호했지. 사람들이 아는 그녀는 그랬을 거요. 아마 호연재의 들뜬 얼굴을 본 이는 많지 않을 텐데, 나는 보았소. 둘째 오라버니 김시윤이 오기 전날 밤 미리 사립문을 열어놓은 호연재를.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문에 기대 구불구불한 산길을 하염없이 바라본 그녀의 얼굴을. 기다리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설레던 표정과 오라버니! 부르며 달려가던 호연재의 발을.

잠깐 머물던 시윤이 가면 그녀는 오라버니가 탄 말이 사라질 때까지, 해가 떨어질 때까지 멍하니 문 밖을 보곤 했소. 호연재는 늘 부모 형제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지. 친정어머니와 아버지는 바둑 내기를 하다 시를 짓고, 술병 들고 강가에 나가 고기잡이배를 함께 바라보곤 했다는구려. 아버지, 어머니, 의붓어머니 그리고 열세 명의 남매가 서로 시를 주고받아 시집을 남겼다지.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시집온 의붓어머니와도 남매들은 시로 화답하며 정을 나누었소.

그러니 오죽했겠나, 그녀의 외로움이. 호연재는 인생을 긴 칼에 비유했지. 아마도 차갑고 뾰족한 칼 위를 타박타박 걷는 마음이었을 거요. 깊은 밤 대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고 매화 향기가 달과 짝할 때, 잔잔하게 흐르는 냇물이 돌과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책을 읽었소. 독서만이 자신의 짝이고 벗이라면서. 때론 술 마시고 취기가 올라 대청마루에 누워 마음의 호사를 부리기도 했소.

“샘에 비낀 별빛 맑은 밤/ 안개바람 댓잎에 스치고/ 비이슬 매화에 엉긴다/ 삶이란 석자의 시린 칼인데/ 마음은 한점 등불이어라/ 서러워라 한해는 또 저물거늘/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야음·夜吟)

그녀는 이백 편이 넘는 한시와 산문집 ‘자경편’, 한글 편지들을 남기고 마흔둘에 진 꽃이었소.

김호연재의 며느리들, 通하였도다

바람이 나고 들듯, 꽃이 피고 지듯, 여인들도 내 품에 왔다 가곤 했다오. 호연재가 생을 마감해 안채를 떠나고 그녀의 며느리 여흥 민씨(1709∼1790)가 이곳에서 숨을 쉬었소. 우연인지 필연인지… 송씨 가문 며느리들은 대를 이어 마음과 마음으로 통했나 보오. 이곳에서 편지를 쓰고, 한시를 번역하고, 소설을 필사하더구려.

여흥 민씨는 이 집안에 낱장으로 보관돼 오던 한글 간찰(편지)을 정리했소. 간찰 140여편과 각각의 봉투를 한지에 정성스레 붙였지. 그렇게 ‘선세언독(先世諺牘)’을 편집했소. 1604년부터 1790년까지 송씨네 며느리였던 진주 정씨, 배천 조씨, 안정 나씨, 밀양 박씨, 그리고 남편이 쓴 편지 등을 책처럼 묶어낸 거요.

이후 시집온 며느리들도 호연재라는 할머니를 잊지 않았소. 호연재는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밝게 공부하셨다, 식견과 취미가 고명하셨다, 천성이 뛰어나게 영리하셨다, 시에 대해 일일이 점을 찍으며 평론해 주셨다, 그렇게 며느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오.

호연재의 증손자 며느리 청송 심씨(1747∼1814)도 호연재의 한시를 즐겨 읽었소.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그녀를 느끼는 것 같았지. 그리고 그 시를 이 고택의 안주인이 될 수많은 여인들에게 전해주려고 운명하기 두 달 전까지도 호연재와 그녀의 친정 오빠들이 지은 한시 이백삼십칠 수를 한글로 번역했소.

청송 심씨의 뒤를 이은 며느리들은 소설을 그리도 좋아했소. 1831년쯤 시어머니와 큰며느리, 작은며느리가 함께 ‘유효공전’을 필사했고, 1년 뒤 ‘유씨삼대록’을 또 필사했소. ‘유효공전’과 ‘유씨삼대록’은 각각 7권과 17권에 이르는 대하소설이요. 애석하게도 어느 며느리가 이 필사본을 남겼는지는 어떤 후손도 알지 못하지. 그건 나만의 비밀이라오.

호연재, 그녀가 술을 좋아했다는 거 말했던가요. 이 집안 여인네들은 음식과 술 만드는 비법도 글로 남겼소. 며느리 연안 이씨(1804∼1860)는 유독 음식하길 좋아했지. 백가지가 넘는 음식과 술, 임신부 건강 비법 등을 적은 조리서 ‘주식시의(酒食視儀)’를 완성했다오.

“동김치는 잘고 모양 어여쁜 무를 골라 정이 잘라 간을 맞추어 삼일 만에 씻어 독에 잘 묻고 군내 없이 하여… 배와 유자를 썰고 생치(꿩고기)를 백숙으로 고아 그 국의 기름기 없이 하고 얼음을 같이 채워서 그 김치국과 합하고 생치살을 지져 섞으면 생치김치요, 동치머리국수를 말자고 하면 그 국에 말고, 후추가루로 실백자(잣)를 얹어 쓰면 명왈(이름하여) 냉면이라 하노니라.”

‘주식시의’는 연안 이씨만의 조리서가 아니요. 그녀가 이곳 흙에 묻힌 뒤엔 그녀의 며느리가, 그 뒤엔 또 다른 며느리가 보완을 거듭했다오. 그래서 ‘주식시의’에 다양한 글씨체가 남아 있는 거요. 송씨 집안 음식 맛에 여러 지방 며느리들의 친정 입맛이 더해져 독특한 맛이 만들어진 거지.

이렇게 집안에 전해 내려온 송순주(松荀酒)는 지금 송준길의 13대 손자인 송봉기(73)씨 부부가 이어받았소. 송봉기씨 부부는 2004년까지 내게서 살며 장독마다 술을 담갔는데, 노환으로 송씨가 여길 떠나고, 외부인들이 잠깐씩 살다 떠나고, 그리고 지난해 문이 잠긴 거요.

동행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생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라오.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소녀들은 내 품에 들어와 여인이 되었고, 그들의 배에서 아이들이 나오고, 아이들은 그녀들의 젖을 빨았소. 그렇게 이어간 이들과 나는 함께 숨을 쉬었소. 공간은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며 숨을 쉰다오. 지금은 닫혀버린 내 주위에 높이 솟은 아파트들이 즐비하다오.

이곳에 왔다 바람결에 떠난 이들을 기억해 주는 이가 많지는 않지. 자랑스러운 송준길의 이름 뒤에 살다간 많은 여인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소. 바람이 차갑소.

◇보물 제209호 ‘同春堂’

대전 송촌동에 자리잡은 동춘당(同春堂)은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48세에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별당 건물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한 송준길은 예학에 밝아 후세에 이름을 떨쳤다. 동춘당은 보물 제209호로 지정돼 있다.

동춘당에서 오른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송용억 가옥’이 있다. 송준길의 12대손인 고 송용억씨의 이름을 딴 이 가옥은 송준길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1646∼1697)가 분가해 거주한 건물이다. 이 가옥에서 송병하의 며느리인 김호연재가 문학 활동을 했다.

이 집은 2004년까지 송준길의 13대손 송봉기 부부가 거주했고, 이후 외부인들이 살다가 1년 전부터는 비어 있다. 송봉기씨의 아내 윤자덕(72)씨는 대전시 무형문화재 9호 송순주(松荀酒) 기능 보유자다.

대전=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