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승만 (6) 해방 후 반공시위 주도했다 퇴학 당해
입력 2010-11-04 17:35
1945년 8월 15일. 사방에서 폭격 소리가 들렸다. 집 앞에 나가보니 곧 더 큰 폭격이 올 거라는 소문이 들려 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겠다” 싶어서 동생들을 데리고 시골로 피란을 가기로 결심했다.
일단 큰 여동생 경신이에게 “동생들 옷 갈아입히고 피란 갈 준비를 해놓아라” 하고 일러준 뒤 옆 동네에서 약방을 하는 외삼촌 댁으로 달려갔다. “피란을 가야 하는데 아무 가진 것이 없습니다. 어려울 때 양식이랑 바꿀 수 있게 약을 몇 첩만 지어주십시오”라고 사정했다. 그렇게 얻은 약첩을 안고 정신없이 뛰어 집으로 돌아갔다.
가 보니 마당에 동생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옷 보퉁이를 하나씩 안고 올망졸망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맥이 탁 풀렸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 어린 것들을 안고 길바닥에 나섰다가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옆집 아주머니가 “승만아, 승만아!” 하며 뛰어 들어오셨다. “피란을 가더라도 오늘 정오가 지나고 가거라. 무슨 중대 뉴스가 있단다!” 하는 것이다.
그때는 라디오를 들으려면 파출소까지 가야 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동네 사람들이 줄지어 파출소로 향했다. 나도 그 틈에 끼여 걸어가자 곧 파출소 입구에 일본 경관들이 부동자세로 선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마치 폭격을 맞은 것처럼 당황스럽고도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곧 일본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귀청을 찢는 ‘만세’ 소리 가운데서 나는 “피란 안 가도 되는구나. 동생들 잃어버리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눈물을 흘렸다.
한달음에 집으로 가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코흘리개 동생들은 눈만 멀뚱멀뚱했다. “이제 곧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오신대” 하자 그제야 깡충깡충 뛰며 기뻐했다. 내 말대로 곧 아버지 어머니 형이 집으로 돌아왔다. 실로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여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다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 이후 나는 평안공업학교로 돌아갔는데 이때도 학업에 매진할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평양은 공산당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대립으로 흉흉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특히 교회와 공산당의 대립이 심했다. 독립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기독교인들이 또다시 첫 번째 탄압 대상이 됐고 모든 교회 집회는 감시의 대상이 됐다. 이에 반발하는 목사들은 구속됐다.
이때 조만식 선생이 세운 기독교민주당에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가입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맨 흰 띠와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조 선생이 거리 연설을 할 때면 나를 비롯한 기독 청년들은 그 열정에 감화돼 함께 조국의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곤 했다.
그러나 공산 정권의 탄압과 점령군인 소련군의 민간인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면서 민심은 갈수록 어수선해졌다. 학교들마다 반공 시위가 시작됐다. 나도 평안공업학교 학생간부로서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합해 전 시내를 장악하고 시위를 했고 진압경찰과 충돌하는 일도 빈번했다. 다치는 학생들도 속출했고 심지어 수류탄이 터진 일도 있었다.
이로 인해 1946년 5월 평안공업학교는 나를 비롯한 5명의 ‘주동자’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이때부터 내 학교 이력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졸업다운 졸업을 하기까지 무려 1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