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천 국가인권위 정책교육국장, “民·官·종교계 등 합력해 한국형 인권모델 만들길”
입력 2010-11-04 17:33
“세계인권선언 한번 읽어보셨어요?”
국가인권위원회 원재천(47) 정책교육국장은 요즘 누굴 만나든지 이 질문을 던진다.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도 이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지난 4월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교수에서 인권위원회로 오면서 나타난 변화다.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세계인권선언 2조 내용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놓고 최근 벌어진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세계인권선언을 한번이라도 읽었더라면 그런 논란은 소모적이지 않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전 전국 16개 시도교육청 학생지도 담당자들과의 회의에서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세계인권선언을 읽어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밝혔다. 세계인권선언 26조엔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다.
원 국장이 하는 일은 인권 정책 수립, 국제인권기구와의 교류 협력, 국민 대상 인권교육 등이다. 심지어 제3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인권실태도 모니터링한다. 그는 “대한민국 인권교육의 기본을 다시 다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인권은 지금 어느 수준에 와 있을까. 그는 “국제 기준에는 아직 모자란 점이 많지만 아시아에서는 모범이 될 수 있는 나라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이 아직 국가인권위를 설치하지 못한 점을 이유로 들었다.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정도가 인권위원회 활동이 활발한 편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남북관계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인권은 보편성을 띠는 것”이라며 “죄를 짓지 않은 어린이까지 처벌하는 것은 어떤 설명을 듣는다 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유엔이 1993년 결의한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파리원칙)에 따라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인권위는 입법·사법·행정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구다.
그는 요즘 매일 올라오는 인권브리핑을 보며 한국의 인권상황에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다고 했다. 이주노동자,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 의료보험 민영화 등이 모두 인권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인권 감수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권 감수성이 강한 사람은 인권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국민들이 많은 나라가 인권 선진국이다. 특히 성희롱이나 성추행, 장애인 차별 등 일상 속 인권 침해는 오직 인권 감수성이 있을 때만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원 국장의 인권 감수성은 오랜 경험과 공부를 통해 길러졌다. 원 국장은 연세대 1학년이던 198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주립대에서 역사와 사회학을 공부하고, 뉴욕 브루클린 로스쿨을 졸업했다. 대학 시절 만난 두 가지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김상균 CCC 간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접한 것, 한 흑인 노동자와의 이야기를 통해 인권문제에 눈을 뜬 것이 바로 원 국장의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 두 사건이다. ‘평생 복음의 빚을 갚으며 살자’는 신념과 미국 흑인인권사와 남북전쟁, 중동 분쟁, 그리고 독일 히틀러와 고백교회의 역사까지 공부한 것도 그 두 만남에서 비롯됐다. 특히 뉴욕주 브루클린 지방검찰청 특수부 가정폭력 담당검사로 활동했던 2년간 그는 여성과 아동들의 피해사례를 접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인간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죄인’이란 결론을 내리고 검사를 그만둔 뒤 부인 이선영씨와 CCC 간사 훈련을 받은 것도 이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인권의 새 모델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최근 봤다는 영화 ‘월스트리트’ 얘기를 들려줬다. 그에 따르면 이미 욕망에 이끌려 옳고 그름의 선마저 양보한 미국은 ‘인권 선진국'이 아니다. 유럽 역시 철저한 계급사회를 못 벗어나고 있다. “이들 나라를 통해 대한민국 인권의 미래를 그린다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정부와 시민사회, 교회를 비롯한 종교가 나서서 우리 사회에 맞는 이론과 틀을 제시하고 그것을 세계에 던져줘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를 인권 중진국이라고 여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역량을 볼 때 인권 선진국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