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법치, 그 길을 묻다’ 펴낸 김기섭 변호사… “선진국 되려면 법과 상식이 통해야”

입력 2010-11-04 17:20


한국은 법치국가인가.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며 쓴소리를 던진 원로 법조인이 있다. 김기섭(65·사진) 변호사다. 42년 동안 법조인으로 살아온 그는 최근 ‘한국의 법치, 그 길을 묻다’(시간여행)라는 회고록을 통해 원칙과 정의가 실종된 한국사회와 법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2일 오후 서울 서초동 김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가 한국 법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었다.

옅은 분홍색 와이셔츠에 회색 조끼를 덧입은 김 변호사는 인터뷰 자리에 앉자마자 판사와 변호사를 거치며 갖가지 사건들과 부닥치고 느껴야했던 회한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다.

“일부 법조계에서는 여전히 유전무죄가 통합니다. 밤에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훔치면 가중처벌로 집행유예를 받을 수 없는데 거액의 공적자금을 빼돌린 기업인들은 화려하게 재기하곤 하죠. 이래선 나라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돼야지요.”

1968년 9회 사법시험에 합격, 인천지방법원과 서울지방법원에서 판사를 지낸 김 변호사는 전관예우와 검찰 스폰서 사건, 사면제도 등을 거론하며 사법정의가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했다.

“평범한 변호사가 맡으면 이기기 힘든 사건인데 고위법관 출신 변호사가 맡으면 승소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변호사들은 특히 거액의 수임료를 받는데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죠. 그렇다고 법조인의 경륜을 포기하랄 수도 없고, 제3의 기구 등을 통해 사건을 배당하고 변호사 보수를 결정하면 어떨까요?”

책에는 목포 앞 무인도 간첩 사건과 김근태 고문사건의 항소심,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탈세 논란, 삼성SDS 사건, IMF 등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뜨거운 논란을 일으킨 사건들에 대한 증언과 성찰이 담겨 있다. 그는 특히 숙명여대 화장실 대자보 사건 등을 회고하며 유신독재 시절 판사로 재직하면서 양심에 반하는 판결을 내려야 했던 과거도 고백했다. “학생들은 재판부를 무시하고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우배석이었다. 한창 꽃피울 나이에 죄수복을 입고 악을 쓰는 아이들이 너무나 불쌍했다. 판사로서 눈물을 보일 수도 없고, 참자니 죽을 지경이었다.”(109쪽)

책에는 이밖에도 한국과 미국의 법 현실을 비교하며 성범죄와 간통죄, 매춘과 사형제에 이르는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입장을 담았다.

김 변호사는 9년간 국제심판원(현 조세심판원)의 비상임 심판관으로 근무하면서 특혜와 반칙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를 수차례 확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IMF 직후 2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나래종합금융과 해태그룹이 부도를 내면서 그 돈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며 “이런 과정 등을 세세하게 기록한 제대로 된 IMF 백서가 우리에겐 없다. 기록이 없으면 교훈도 없다”고 지적했다.

글·사진=김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