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컬렉션’ 그 지난했던 궤적들… ‘뮤지엄을 만드는 사람들’

입력 2010-11-04 17:16


뮤지엄을 만드는 사람들/최병식 지음/동문선

“(장신구를 모으기 위해 팔았던)그 집을 지금 가지고 있었더라면 노후에 넉넉히 먹고는 살았을 것입니다.”

외교관의 부인으로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장신구를 모아 세계장신구박물관을 설립한 이강원 관장의 말은 박물관 관장이라면 누구나 늘어놓는 푸념이다. 돈과 안락함을 포기하면서까지 예술품을 모으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다. 수집의 대상은 도자기, 그림에서부터 돌, 장신구까지 다양하다.

최병식 경희대 미술대 교수의 저서 ‘뮤지엄을 만드는 사람들’은 수집을 통해서 문화의 등불이 된 28명의 인생을 조명했다. ‘뉴 뮤지엄의 탄생’ ‘박물관 경영과 전략’으로 이어진 박물관 미술관학 시리즈의 3탄인 이 책은 국내 사립박물관과 미술관을 설립한 28명 관장들의 수집 과정과 굴곡을 지닌 삶의 궤적을 담았다. 저자는 26개 사립미술관에 대해 4년간 자료 조사를 했으며 28명 관장들을 100여 차례 인터뷰했다.

“자,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가 하라고 시키고, 누가 참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길 기대하거나 상장을 받거나 영예를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으로서 뜻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토탈미술관의 노준의 관장은 미술관을 세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노 관장 부부는 1978년 경기도 장흥으로 이사해 ‘디자인 교육관’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호화 별장세’를 부과할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건물 부지 중 일부가 농지였는데, 농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할수 있는 예외 조항에 ‘레미콘 공장’은 있었지만 ‘미술관’이 없어 결국 좌절을 맛봐야 했다.

87년 어렵사리 ‘준 박물관’으로 미술관이 세워졌지만, 그 이후에도 경영 적자로 미술관은 번번이 존폐의 기로에 선다. 하지만 노 관장은 무명의 젊은 예술가가 자신이 세운 미술관 전시를 발판 삼아 해외로 뻗어나갈 때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 맛에 미술관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노 관장의 모습은 한국자수박물관을 설립한 허동화 관장의 얼굴과 겹쳐진다. 허 관장은 1960년대부터 유물 컬렉션을 시작해 76년 자신이 살던 서울 중구 을지로에 소규모 한국자수박물관을 설립했다.

허 관장의 미술 수집을 호화스런 취미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허 관장에게 박물관은 조국애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는 해외에서 동양의 아름다운 자수를 소개하는 전시회를 여러 번 개최했는데, 그 때마다 전시된 도자기나 보자기, 자수를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교포들의 모습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박물관을 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일에 ‘미친’ 사람들이다. 1964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제주민속박물관을 설립한 진성기 관장은 “그간 고통도 많았지만 미치면 행복해서 고통도 잊게 된다”고 말한다. 진 관장은 대학 시절 제주 민속 문화를 연구할 때부터 생활고에 시달렸다. 발품을 팔아 자료를 모으고, 채록과 사진촬영을 이어가면서,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하고 경찰서에 불려간 적도 숱하다. 제주 민속 문화에 대한 책을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어서 자비로 출판을 해 빚을 떠안았고, 2남4녀의 자식들은 동네 천주교에서 얻은 ‘죽 쿠폰’으로 끼니를 달래기도 했다.

끔직한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제주민속박물관을 설립,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때 그 시절에 발견하지 못했으면 벌써 흙이 되어 없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관람객들이 이런저런 유물들을 관람할 때 그 유래를 들려면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과거를 떠올리면 그냥 즐겁지요.”

저자가 들려주는 박물관과 미술관 관장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 옷깃이 절로 여며진다. 사재를 털어 모으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소장품들보다도 더 값진 ‘유물1호’는 바로 그들이 아닐까.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