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외발 아이티 소녀, 두 발로 걷다
입력 2010-11-03 18:40
‘이웃 1호’에 소개된 조니아, 한국서 의족 선물
조니아 생루이(11)양. 지난 1월 13일 아이티 대지진에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었다. 지진 발생 당시 무너진 건물 벽에 다리가 깔렸기 때문이다. 조니아는 의료 환경이 열악해 마취를 하지 않은 채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본보 9월9일자 34면·왼쪽 사진)
조니아에게 3일 다리가 생겼다. 지진 직후 아이티에 의료진을 파견했던 분당 서울대병원의 도움으로 이날 의족을 오른쪽 다리에 부착했다. 병원은 국제구호단체 ‘굿피플’의 초청으로 지난달 26일 한국을 방문한 조니아의 의족 제작 및 재활치료를 돕기로 했다.
병원 측은 지난주 체형과 다리 절단면의 상태를 정밀 분석한 자료를 미국으로 보내 긴급히 의족을 제작했다. 2일 밤늦게, 드디어 기다리던 그의 의족이 병원에 도착했다.
“새 다리가 생겼어요.”
이튿날 오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1층 재활의학과에 환호성이 터졌다. 신형익 교수 진료실로 들어오는 굿피플 안익선 기획홍보실장의 양손에 그 의족이 들려 있었다. 235㎜ 분홍색 신발에 끼워져 있는 약 50㎝ 길이의 철제 다리. 조니아는 크레올어(아이티 흑인들의 언어)로 “저한테 다리가 생기는 거예요?”라며 기뻐했다. 그의 밝은 웃음을 본 사람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사실 의족을 직접 보기 전까지 조니아의 표정은 어두웠다.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듯했다. 통역을 맡은 박정숙씨는 “지진 당시 현지 병원에서 마취를 하지 않고 다리를 잘랐어요. 그때부터 병원을 무서워해요”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 신 교수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조니아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다리를 자르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다니….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옆에 서 있던 안 실장이 시종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빠, 엄마, 하나뿐인 동생과도 지진 때 헤어졌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두 달 전 아이티에서 기자가 만났을 때 다리가 나으면 아이티 북부 어딘가에 있는 친동생을 찾으러 갈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다리가 생긴다는 생각에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이 조니아의 기분을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린 그에게 마음 속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다리를 다쳤던 그 순간이 악몽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11세 소녀인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안 실장이 바나나를 손에 꼭 쥐어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나나 껍질을 뜯으며 웃음을 지었다(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바나나다).
잠시 후 의족이 도착했다. 표정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박정숙씨에게 물었다. “조니아의 새 다리야.” 뭔가 미덥지 않은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족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 그런 조니아 앞에서 신 교수 역시 다리 절단 부위와 의족을 번갈아 살폈다. 신 교수는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절단 부위를 만질 때마다 많이 아픈지 미간을 찡그렸다. 신 교수도 미안해했다. 피부와 의족 사이의 마찰을 줄일 수 있도록 실리콘을 처리했지만 만졌을 때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처음 다쳤을 때 치료가 제대로 안 돼서 더 그럴 겁니다.”
신 교수가 조심스럽게 다리에 의족을 끼웠다. “자, 한번 서보자. Stand up!” 조니아가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새 다리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는지 웃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치료를 받으러 온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조니아 역시 엄지를 올리며 “예!”라고 소리쳤다. 새 다리로 깡충깡충 뛰려는 걸 안 실장이 가까스로 말렸다.
두 다리로 서는 게 얼마만인지….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10개월 만에 되찾은 오른쪽 다리. 믿기지 않는 듯했다. “와, 너무 좋아요.”
“이제 한 걸음씩 걸어보는 거예요.” 신 교수의 말에 따라 좁은 진료실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다리를 뗐다. 한쪽 벽에서 문까지. 성한 다리였다면 뛰어서 1초면 올 거리였다. 그러나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그에게는 꽤 길어 보였다. 1분이 걸려서야 문에 도착했다. 힘이 들었는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이라 불편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기지개를 켜며 활짝 웃었다.
신 교수는 한 발씩 내딛는 아이의 모습을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아직 안 되겠어. 걸을 때 다리가 자꾸 바깥쪽으로 빗겨나가고 있어요.” 의족을 담당하는 병원 직원에게 말했다. 서 있기만 할 때는 의족의 상태가 올바르지만 소켓(다리의 절단된 부분을 감싸주는 장치)이 다소 바깥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했다.
1시간이 지났을까. 병원 직원이 손을 본 의족을 가지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얼른 걷게 해 주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급해요.” 신 교수는 다급했다. 다시 다리에 의족을 끼웠다. 조니아도 아까보다는 조금 적응이 된 모양이다. 걷는 모습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번엔 좀 더 오래 걸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나가 복도에서 한동안 걷기 연습을 했다. 조니아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줬다.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신 교수는 “재활만 잘 따라오면 평지는 물론, 오르막을 걷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 걸을 수 있게 온 힘을 다해 보살펴야죠”라고 말했다. 조니아는 의족 적응 기간을 가진 뒤 이르면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재활치료에 들어가기로 했다. 심리치료와 스포츠치료를 병행한다. 안 실장은 “이르면 오는 18일 목발 없이 출국하게 될 예정이에요”라고 귀띔했다.
오랜만이야, 네 밝은 웃음
전날 오전에도 서울 구산동 서울재활병원에서 조니아와 함께했다. 두 달 전 인터뷰가 어려울 정도로 의기소침했었던 조니아는 많이 밝아졌다. 그 조용했던 아이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안냐세요.” “감삽니다.” 한국말이 들리는 대로 따라했다.
“조니아, 나 기억해?” 조니아는 한참 동안 골똘히 기자의 얼굴을 뜯어봤다. 그러고는 “아!” 외마디 소리를 냈다. 박정숙씨가 “기억난대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조니아가 집게손가락으로 기자를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병원과 붙어 있는 재활스포츠센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수영장. 어릴 때부터 물놀이를 좋아했단다. 다리를 다친 뒤 물놀이를 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동생과 물장구치던 생각이 났는지 아무 말 없이 코를 훌쩍였다. 바나나를 들이대도 묵묵부답. 수영장만 바라봤다.
그런 그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수영복, 수영모자, 물안경. 모두 좋아하는 분홍색으로 맞췄다. “우와!” 그 큰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선물을 받아들자마자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유아용 수영장으로 다가섰다. 처음엔 수영복을 입은 게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리고 킥킥댔다. 조니아는 큰 숨을 한 번 들이켠 후 수영강사 채수엽씨를 향해 몸을 던졌다. “풍덩”소리와 함께 밖에 있던 사람들의 옷에 물이 튀었다.
안 실장은 “한국에 온 뒤 이렇게 기뻐하는 건 처음이에요”라고 말했다. 물 속에서 왼쪽 다리를 이용해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갔다. 처음엔 균형을 잡지 못해 고생했지만 이내 안정감을 찾았다. 튜브에 몸을 맡긴 채 물장구를 칠 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게 소리를 질렀다. 고무공 여러 개를 던져줬다. 작디작은 손에 쏙 들어가는 조그만 공을 쥐고 농구 골대를 바라봤다. 여섯 번 만에 첫 골이 들어가자 수영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That’s good!(좋았어!)”
“점심시간이야. 밥 먹으러 가자.” 박정숙씨가 말하자 한 마디 답변이 돌아왔다. “No!(싫어요!)”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결국 바람대로 10분 더 물장구를 치고 나서야 수영장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깔깔대며 크레올어로 한마디를 했다. “밥 먹고 또 오는 거지?”
오랜만에 가장 좋아하는 놀이를 한 그의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받은 선물들.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안녕 가쎄오.” 그새 배운 한국어 인사를 하며 기자에게 손을 흔드는 조니아의 얼굴에서 기쁨이 묻어났다.
글 조국현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홍해인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