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 찬숑가 (선교부 연합공의회 편, 1908)

입력 2010-11-03 17:57


262편 수록 12만권 발행… 현행 찬송가 모태

찬송은 기독교 예배에서 필수 요소다. 1880년대 백홍준 서상륜 등 복음의 선구자들이 교회를 세워 예배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시는 우리말 찬송가가 없었기 때문에 한문 찬송가를 가지고 사용했다. 중국어 또는 한문의 우리말 발음으로 찬송을 불렀던 것. 그리고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의 채플 시간에는 영어로 찬송가를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 최초의 우리말 찬송가인 ‘찬미가’가 발간되었다. 감리교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엮은 소책자인데 악보 없이 가사만 번역된 찬송가 27편이 수록되었다.

악보가 실린 최초의 찬송가는 1894년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펴낸 ‘찬양가’인데 117편의 찬송이 들어 있다. 이 ‘찬양가’는 서양식 악보가 실린 첫 번째 음악책으로 예배와 전도는 물론 서양 음악의 수용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찬양가’의 수록 곡은 다음 해 재판에서는 154곡으로 늘어났고 1900년에는 182곡이나 되었다. 또한 장로교에서는 1895년 선교사 리와 기포드가 편집한 찬송가가 ‘찬셩시’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이래 계속 증보되어 1902년에는 장로교의 공인 찬송가로 채택되었다.

감리교의 ‘찬미가’ 역시 1895년 81곡, 1900년 176곡, 1902년 205곡으로 계속 불어났다. 감리교의 ‘찬미가’ 중에서 한국인이 펴낸 찬송가도 있다. 1905년 윤치호가 역술(譯述)하고 광학서관이 발행한 ‘찬미가’인데 15편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악보는 없지만 황제를 칭송하는 노래와 애국송이 들어 있다. 특히 제14장의 가사는 현재의 ‘애국가’와 거의 같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한 만세’로 나와 있다. 말하자면, ‘애국가’가 찬송가의 하나였음을 알게 된다. 당시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현행 찬송가 338장)에 맞추어 부르도록 표시되어 있었다. 후에는 찬송가에서 빠지고 곡도 안익태 작곡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금 보아도 신앙고백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찬송가는 교회에서만 불리는 것이 아니라 개화의 물결을 타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갔다. 국민은 찬송가의 곡조에 나라 사랑과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가사를 붙인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한편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연합기구를 설립하는 데 힘을 쏟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배드릴 때 통일된 찬송가를 불러야 한다는 인식이 고조되면서 ‘찬숑가’라는 장로·감리교 연합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1908년 초판 6만권, 같은 해 2판도 6만권이 발행된 ‘찬숑가’는 선교부 연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에서 편찬 책임을 맡았다. 장로교의 베어드와 밀러 그리고 감리교의 벙커가 위원으로 활동했다. 위원회는 기존 찬송가들을 개정·보완하고 새로운 찬송가도 첨가하여 모두 262편으로 꾸몄다. 한국 고유의 곡조로 부르게 한 찬송가도 여섯 편 포함되었고, 번역도 예전 찬송가보다 세련되게 다듬어져 현행 찬송가의 모태가 되었다.

이 찬송가들은 1900년대 이후 한국 교회 부흥운동이 활기차게 전개되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당시 불렸던 찬송가 가사의 대부분은 18∼19세기 영미문학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계열 작가의 시에서 나왔다. 그 결과 서구의 문예 사조가 찬송가를 통하여 한국에 전파됨으로써 우리 시문학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부길만 교수(동원대 광고편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