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역서 소외 이웃들에 문 열린 ‘명동분식’ 권장숙씨… 국물 보다 대화가 따뜻했다

입력 2010-11-03 17:46


따뜻한 밥 한 공기와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이 세상을 데운다. 서울역 광장 신생교회는 매주 수요일과 주일 오전 11시에 노숙인과 부랑인, 출소자, 여행객, 쪽방 거주자들과 함께 열린 예배를 드린다. MC 최선규씨는 예배가 끝나면 광장 남단에 있는 ‘해돋는 마을’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밥퍼’ 봉사대를 지휘한다. 최씨는 길거리로 내몰린 이들을 부축해 정직한 사람, 믿음의 사람, 섬기는 사람, 남을 칭찬하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경인전철의 종점에 있는 ‘명동분식’은 겉으로만 보면 평범한 가게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인 권장숙씨는 26년째 독거노인 등 소외된 이들을 섬기고 있다. 그녀가 삶아주는 국수 한 그릇엔 늘 복음과 사랑이 가득하다. ‘역전앞’엔 그들이 있다.

소외받는 노인들 보살펴 드려야죠

10월의 마지막 주말 오후. 인천에 소문난 분식집이 있다는 제보만 듣고 1호선 인천행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경기도 부천역과 인천시 부평역, 제물포역을 지나자 차 안은 한산했다. 노약자보호석에 앉은 70대 남녀 노인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친구처럼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뭐든지 잘 잡숫는 분처럼 보이네요. 그렇죠. 참, 건강하시군요. 내 말이 맞지요.”

“그럼요. 전 김치와 밥만 먹어도 이렇게 살이 쪄요. 무엇을 먹어도 맛있어요.”

서울역을 출발한 지 50여분 만에 경인전철 출발역 지나 종착역 인천역에 도착했다. 20세기 초반에 생긴 역을 이곳 사람들은 하인천역이라 부른다. 역사 건물은 나지막한 2층으로 지방의 아담한 간이역 같아 보였다. 광장 끝자락 은행나무 아래선 노인들이 떨어진 은행을 줍고 있었다. 오른쪽 대각선 방향에 차이나타운을 알리는 아름다운 패루(牌樓)가 보였다. 그 왼쪽 3층 규모의 상가건물 1층에 ‘명동분식’이라는 오래된 간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잔돈이 없다니까요. 선생님, 그냥 가세요.”

“받으세요. 어머니, 공짜로 먹고 갈 순 없잖아요.”

분식집 주인 권장숙(62)씨는 거스름돈이 없다는 핑계로 우동 한 그릇 값을 받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의 스승에게 식사비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드르륵…” 70년대식 여닫이 문이 열렸다. 연두색 상의에 얇은 목도리를 한 할머니가 목청을 높이면서 들어왔다. “배고파. 나, 왔어, 우동 한 사발 줘 빨리.”

그 할머니였다. 전동차에서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이들에게 ‘사랑해요’라는 인사를 하던 분이었다. 뇌혈관이 막혀 수술을 4번이나 받았다고 했다. 칠순이 지났다는 할머니는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아 발음이 어눌했다. “일산에서 왔어. 서울역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왔지.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우동 맛은 이 집이 최고야.”

할머니는 고춧가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동 그릇을 싹싹 비웠다. ‘사랑해요 할머니’가 떠난 지 얼마 안 돼 전화벨이 울렸다. “오세요.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기다릴게요. 예, 예.” 경기도 문산역에서 출발한 74세 할아버지 한 분이 벌써 두 번째 전화를 한 것이었다. 3시간이 더 걸리는 길을 오로지 국수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오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 의정부와 수원, 미국에서도 오세요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평균 식사 시간이 1시간이 넘는다. 권씨는 며느리와 딸보다 더 살갑게 이들의 시중을 든다. 손님들이 좀 뜸해지자 권씨는 지난 여름에 다녀간 미국에 사는 82세 된 할아버지의 건강도 염려했다. “파킨슨병이 걸린 분인데 올해는 표정이 예전 같지 않았어요. 미국에 계시다가 잠깐 나오셨어요.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고 가셨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경북 점촌에서 직원 400∼500명을 두고 탄광사업을 했던 78세 할아버지 사연도 소개했다. 그 할아버지에겐 배려심이 많은 막내아들이 있다. 아들은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지자 명예퇴직을 선택하고 뒤늦게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서울 종로에 내로라하는 종친회 사무실에서 문중 일을 보고 있는 터라 아들이 목회자가 되는 것을 바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등록금을 대줄 정도로 자식 사랑이 극진했다. 아들이 개척교회를 시작하자 살고 있던 집을 팔아 작은 곳으로 이사를 하고 남은 돈을 며느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절대로 교회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다녔다.

권씨는 그 할아버지가 국수를 먹으러 올 때마다 아들이 하는 교회에 아버지가 나가지 않으면 누가 나가겠느냐, 등록금도 대 줬는데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얼마 전에 그 할아버지가 가게에 오셨어요. ‘나 오늘 아들 교회에 갔다 왔어’ 하시는 거 있죠.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권씨가 본격적으로 분식집을 시작한 것은 1984년 봄이다. 결혼 10년 만에 밀가루를 만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시집 올 때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를 따라 인천 숭의감리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80년대 초반에 남편이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밀가루와 인연을 맺게 됐다.

90년 대 후반 외환위기가 몰려오면서 권씨는 분식집 운영 방식을 바꿨다. 하루아침에 가정 파탄으로 길거리로 내 몰린 이들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가게 앞을 수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실직자들이었어요. 처음엔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더군요. 배고픔을 이길 장사는 없는 법이죠. 그럴 땐 일부러 문을 열어 놓기도 했죠.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모기 소리보다 작게 밥 좀 달라고 할 땐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어요. 남들이 눈치 채지 않게 비닐봉지에 김밥을 넣어 드렸죠.”

권씨는 집 나온 청소년들의 임시 보호자 역할도 했다. 분식집 옆 화장실은 가출한 청소년들의 흡연 장소였다. 권씨는 눈을 뜨고 탈선하는 아이들을 그냥 모른 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용히 불러서 어묵 국물과 김밥을 먹였다.

“참 예쁘구나, 그런데 담배 안 피우면 더 예쁠 텐데, 정말 맛있니, 라고 물으면 ‘그냥 습관이 돼 피울 뿐’이라는 대답을 하더라고요. 몇 번 얼굴이 익으면 터놓고 이야기했죠. ‘담배, 그거 네 뼈와 살을 녹이는 거야, 피우면 안 된다고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말을 잘 듣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어요.”

권씨는 12년째 갑상선 종양과 싸움을 하고 있다. 좁쌀 같은 것이 3∼4개 정도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밀가루와 이별할 생각이 없다. 제 앞가림 잘하는 1남2녀는 고단한 일상에서 버팀목이 돼 주는 든든한 후원군이다.

그녀는 늦게 공부도 시작했다. 방송통신대 중문과 3학년이다. 칠순이 되기 전에 중국으로 가서 여행도 하고,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면서 살고 싶단다. 얼마 전에 모아뒀던 헌 옷 몇 벌은 벌써 새 주인을 찾았다. 주방 옆 옷걸이엔 두꺼운 목도리 2장이 걸려 있다. 갑자기 집을 나온 이들을 위한 배려이다.

글 윤중식 기자·사진 구성찬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