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인 노동자 예배 인도 룽티와 마모… 태국인과 예수님 잇는 작은 다리 됐으면
입력 2010-11-03 18:45
지난달 30일 인천시 남동구 고잔동에 있는 한국외국인선교회에 태국인들이 몰려들었다. 선교회 2층에 모인 이들은 1주일 만에 만나 연신 깔깔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먼저 와 앞자리에 앉아 기도하던 한 여성이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자 강대상 위로 올라갔다. 웃음꽃이 잦아들었다.
룽티와 마모(40·여) 전도사.
한국에 살고 있는 태국인 노동자를 위한 예배를 이끈 지 2년째. 불교 국가 태국 출신 노동자 20여명이 마모씨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다.
지난 2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마모씨를 만났다. 그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20대 태국 청년 이야기부터 꺼냈다. “한국에서 일하다 폐암에 걸렸죠.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로 하나님을 영접했지만 결국 고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청년이 태국에 있는 동안에도 매일 국제전화를 걸어 기도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있는 힘을 내 “아멘”을 따라하던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사망 이후 그 청년의 아내가 마모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죽음을 맞이한 마지막 순간, 남편의 표정이 그렇게 평온할 수 없었어요. 그가 믿은 하나님을 저도 믿겠어요.”
마모씨의 삶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불교도가 95%를 차지하는 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3대째 기독교 집안의 맏딸이다. 그의 부모는 “첫 자식은 무조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해 놨다. 이에 대한 이웃의 박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초등학교 때 등교하면 매일 아침 부처님께 절을 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어요. 전교에서 절을 하지 않은 학생은 저뿐이었죠.” 친구와 교사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주 마모씨를 주일학교에 보냈다. “머리에서 열이 펄펄 나도 예외가 없었죠. 교회는 무조건 가야 했어요.” 마모씨가 동생과 싸울 때, 말을 듣지 않을 때 어머니는 “하나님이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말이 왜 그리 무서웠는지 몰라요. 그 말은 제 삶을 지배하게 됐죠.”
그는 1991년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됐다. 당시 그가 재학 중이던 파얍대학교 신학과의 신축건물 개관 파티에 오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고 만다.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은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이었다. 한 달간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던 중 그는 희한한 체험을 했다.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온몸이 뜨거워지더니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그는 그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라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전도사 생활을 하던 그를 어느 교수가 “한국의 이화여대에 가서 신학을 더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망설였다. 2006년 태국 북부를 강타한 홍수로 마모씨의 집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행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이어졌다. “집 전체가 물에 잠기고 살림살이들이 떠내려갔는데 책상 하나만 멀쩡했어요. 그 책상 위에 이화여대 입학허가서와 비자 관련 서류가 놓여 있었는데 조금도 물에 젖지 않았죠.”
그는 한국에 와 신학을 깊이 있게 배우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했다. 그의 꿈은 간단했다. “태국인과 예수님을 잇는 작은 다리가 됐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 전 세계의 관광객이 즐겼던 송끄란 축제(매년 4월 중순 태국 전역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물의 축제) 당시 방안에서 홀로 기도하던 소녀 마모는 이제 태국인에게 하나님을 전할 전도인이 됐다.
글 조국현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