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늦가을 서정
입력 2010-11-03 18:34
결실의 9월, 홍엽의 10월을 보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의 11월. 중년의 악장(樂章)은 흘러가고 노년의 서주(序奏) 같은 늦가을.
밤기운이 승하다. 중국 남조의 시인 강엄(江淹)은 “가을 밤은 한 해 같고 가을의 정은 실 같다”고 했다. 밤은 짙고 정은 면면하다. 그러나 고갈의 때가 기다리고 있다. 강엄의 꿈에 한 사람이 나와 맡겨두었던 붓을 돌려달라고 했다. 강엄이 품에서 오색붓을 꺼내 돌려주고 나자 그 후론 시를 짓지 못했다. 강엄재진(江淹才盡)의 고사.
위대한 선배 베토벤의 교향곡을 이으려다 좌절한 브람스. 욕망을 버린 브람스의 체념이 빚은 걸작이 그의 교향곡 3, 4번이다. 3번 3악장에서 스승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연모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이의 늦가을 같은 우수를, 4번 1악장에서 쇠락해가는 인생의 가을 같은 애잔(哀殘)을 만난다. 그래서 ‘가을에는 브람스’다.
해마다 이맘때 열려 ‘가을의 고전’으로 불리는 월드시리즈. 올해도 어김없이 희비가 갈렸다. 56년 만에 우승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창단 이래 50년 동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한 텍사스 레인저스. 더 관심을 모은 두 ‘절세 투수’ 팀 린스컴과 클리프 리의 명암도 갈렸다. 끝없이 바뀌는 승패의 풍경이야말로 불멸의 고전이다.
가을은 우국의 계절이기도 한다. 구한(舊韓) 말 선비 황현(黃玹)은 나라를 잃은 해 가을 등불 아래 보던 책을 덮고 아편 덩어리를 삼켜 자진했다. 청나라 말 혁명을 꿈꾸었던 여걸 추근(秋瑾)은 형장에서 “가을바람 가을비, 수심(愁心) 속에서 죽는다”라는 절명사를 남겼다.
가을과 역사를 합한 김정희(金正喜)의 호 추사(秋史)를 이 계절에 비로소 알 듯하다. 추(秋)는 수(愁)와 통한다. 어려서 겪은 가문의 환난 속에서 추사는 여위어 가는 왕조의 앞날을 근심한 것 아닐까. 추사가 벼슬살이를 접은 후 이 호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추사가 오른 북한산 비봉 능선에서 서해를 물들이는 낙조를 본다. 서울의 절대 풍경이다. 컴컴해진 하산길에서 한치 앞 어둠을 랜턴에 기대 더듬거리며 내려온다. 노년의 험로(險路) 예감.
“나이 많은 사람은 안 맞죠.” 며칠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말이 겨울을 재촉하는 전령사 같다. 당나라 문인 구양수(歐陽脩)는 “가을의 기운은 몸에 스미도록 차가워 살과 뼈를 찌르는 듯하고,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도 적요(寂寥)해진다”고 했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