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바둑이야기] 자신의 대국 기록해야 진짜 프로
입력 2010-11-03 17:25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바둑을 업으로 삼고 있는 프로기사들의 꿈은 좋은 기보를 남기는 것이다.
한국의 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중국바둑의 무서움을 세계에 보여주며 중국랭킹 1위를 차지했던 구리 9단이 최근 달콤한 휴가를 보냈다. 하지만 휴가기간 그가 한 일은 1995년 입단 이후 자신의 기보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구리 9단의 공식기전은 1157국. 800승 357패로 승률 69%다.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중국은 기사들의 대국통계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구리 9단 스스로 정리를 한 것이다. 15년 동안 천 판이 넘는 바둑을 두었으면서도 이처럼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구리 9단의 성실한 습관 때문이다.
그는 시합이 끝날 때마다 방으로 돌아와 한 판도 거르지 않고 자신의 바둑을 기록했다. 프로기사에게 자신의 바둑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그리 어렵고 대단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말도 안되는 실수로 질 수 없는 바둑을 놓쳤을 때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 바둑돌도 쳐다보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구리 9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한판의 바둑을 마치고나면 꿋꿋하게 기록해 그 인내와 노력이 가상하다.
대부분의 프로기사들은 본선대국으로 기원에서 기록해주지 않는 시합이 아니라면 자신의 기보를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지금까지 프로가 되어 몇 판을 두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어쩌면 기보는 프로기사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이고 역사이고 삶의 이유이다. 그런데도 한판 한판의 기록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기사가 평생 승부를 펼치면서 추억할 수 있는 기보 하나 없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기록이라는 습관을 통해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정리했던 구리 9단은 이번에 작은 선물을 받았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800승이라는 기록을 알게 된 것이다. 기사는 100승 200승 승리를 채워나가는 것이 그 험난하고 치열한 승부를 해나가는 이유이다. 이제 곧 1000승을 바라 볼 구리 9단이다.
구리 9단은 지난 대국들 중에 가장 행복하게 기억에 남는 기보는 2005년 이세돌 9단을 꺾고 세계무대 결승에 진출한 것이고, 가장 사무치게 아픈 기보 역시 2004년 이세돌 9단에게 패한 기보라고 한다. 자신의 기보를 하나하나 들춰보며 자신의 바둑 인생을 추억하는 구리 9단에게서 진정 바둑을 사랑하고 즐기는 위대한 승부사의 모습을 본다.
<프로 2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