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전석운] 여성 파워 시대의 과제
입력 2010-11-03 18:34
여성파워가 돋보이는 시대다. 오는 11∼12일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자 중 4명이 여성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호주의 줄리아 길러드 총리,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 그리고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가 그들이다. 주요국 정상회의에 여성지도자가 이토록 많이 참가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들 여성지도자가 이끄는 4개국의 GDP(국내총생산, 2009년 기준)를 합하면 6조2340억 달러로 미국(14조2562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규모다. ‘G2’ 대접을 받는 중국(4조9089억 달러)이나 ‘아직은 2위’인 일본(5조680억 달러)의 경제규모를 훌쩍 넘어선다.
G20을 포함해 최고지도자가 여성인 나라는 아일랜드(메리 매컬리스), 핀란드(타르야 할로넨) 등 모두 14개국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여성지도자의 등장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국도 가장 인기 있는 대선후보가 수년째 여성 정치인이고 보면 세계적인 추세와 겉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성 총리, 여성 장관, 여성 대법관, 여성 대학총장을 배출했다. 고위 공무원으로 가는 관문인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는 올해도 여풍이 거셌다. 사법시험 2차 합격자 중 여성비율은 42.1%로 역대 최고였고 외무고시는 최종합격자의 60%가 여성이었다.
재계에도 여풍이 당당하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처럼 오너 가족이어서 CEO 자리에 오른 여성들도 있지만 자신의 실력만으로 창업하거나 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은 여성들도 적지 않다. 최근 단행된 CJ그룹 인사에서는 ‘30대 그룹 최초의 여성 CEO’ 타이틀을 달았던 CJ엔테테인먼트 대표이사 김정아(48)씨가 상무에서 부사장 대우로 승진했다. CJ그룹에서 여성이 부사장급 임원으로 오른 건 김씨가 처음이다.
그러나 화려한 여성파워의 이면에는 여전한 그늘이 있다. 여성의 고시 합격자는 급격히 늘었지만 고위공무원단에 진출한 여성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부 부처의 한 국장급 간부 여성은 “남성중심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승진과 보직에서 여성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많은 여성들은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가장 큰 고충은 육아와 자녀교육이다. 출산과 이어지는 육아부담, 자녀교육 문제는 여성들에게 직장 포기나 경력 단절을 강요한다. 시댁이나 친정에서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가정은 그나마 다행이다. 젊은 맞벌이부부 중에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때문에 아예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여성도 적지 않다.
여성인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손실이다. 선진국의 예를 보면 경제발전 단계가 성숙할수록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2000년 이후 유럽에서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 4개 중 3개는 여성이 따냈다. 미국에서는 최근 10년간 여성 창업주가 남성 창업주보다 배 많았으며 금융위기 이후 남녀 간 실업률은 여자가 8.6%로 남자(11.2%)보다 낮았다. 남녀 간 GDP 분담비율을 보면 유럽의 경우 여성이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코노미스트지는 분석했다. 통계로 잡히지 않는 가사부담 등까지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GDP의 절반에 육박하거나 이를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 일부 기업들이 사내 보육시설을 짓고 자녀 사교육을 지원하는 것은 여성 인력 활용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으로 보여 반가운 일이다. 개별 기업의 노력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를 달라’는 요구에도 귀 기울여야 하겠다. 장차관 등 고위직과 국회의원, 대기업 CEO, 대학총장 등 지도층에 더 많은 여성이 등장하길 기대한다.
전석운 산업부 차장 swchun@kmib.co.kr